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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오늘은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날입니다"

인사이트위키백과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1923년 1월 12일 밤 8시,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쾅'하는 굉음이 울렸다.


귀를 멀 정도의 굉음이 울린 곳은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독립운동가 검거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 누군가 폭탄을 던진 것이었다.


혼란에 빠진 일본 경찰은 1천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폭탄을 던진 범인을 찾았고, 10일 뒤 쌍권총을 든 '항일 투사'와 맞닥뜨렸다.


장장 3시간 35분 동안 가옥의 지붕을 넘나들며 '1천대 1'의 총격전을 벌인 항일 투사는 몸에 11발의 총알을 맞고도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을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겨누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뒤 자결했다.


죽기 직전까지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항일 투사의 이름은 김상옥. 당시 나이 34세였다.


인사이트동아일보


1890년 서울 동대문 효제동에서 4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난 김상옥 의사는 집안이 가난해 어렵게 성장했으나, 생계를 꾸리고 야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정진했다.


김 의사는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반일 비밀 조직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해 배포했다.


1920년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본격적인 의열 투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인 활동을 원했던 김 의사는 2년 뒤인 1922년 12월 권총 4정과 탄환 800발 그리고 일생일대의 의거 계획을 가슴에 품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김 의사는 상하이를 떠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지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인사이트온라인 커뮤니티


비장한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온 김 의사는 동지들과 거사 준비에 서둘렀고,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에 폭탄을 투척했다.


투척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김 의사는 원래 목표였던 사이토 총독이 서울역에 행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울역 주위를 배회하다가 1월 17일 새벽 일본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당했다.


하지만 김 의사는 열에 아홉 발을 명중시킨다는 '명사수'였고 치열한 격전 끝에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했다.


이후 효제동에 은신하고 있던 김상옥 의사는 1월 22일 다시 일본 경찰과 맞닥뜨렸다. 당시 일본 경찰의 수는 1천여 명(근접 500명). 이곳이 마지막 격전장이 될 것을 예감한 김 의사는 인근 가옥의 지붕을 넘나들며 무려 3시간 35분 동안 일본 경찰과 '1천대 1'의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쌍권총으로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을 사살한 김 의사는 총알이 다 떨어지자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로 자결했다. 상하이를 떠나기 전 동지들과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상옥 의사.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김 의사의 몸에는 11발의 총상이 있었다.


김지현 기자 john@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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