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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김좌진 장군은 공산당원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인사이트] 배다현 기자 =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렸으니 당신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오"


김좌진 장군은 어려서부터 인정이 많고 약자를 돕는 것을 중요시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불러 놓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해 체결된 을사조약에 비통해했다. 그리고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1907년 고향으로 내려온 김좌진 장군은 자신의 집을 학교로 내주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가산을 정리해 그 돈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인사이트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의 복원된 생가 /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대한 광복단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군자금 모금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김좌진 장군은 만주로 넘어갔다. 당시 만주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군 단체가 많았다. 하지만 하나로 뭉치지 못한 채 모두 제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독립군 단체를 찾아다니며 서로 힘을 모을 것을 요구했다. 마침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독립군 통합·재편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립군은 '서로 군정서'와 '북로 군정서'로 통합됐고, 김좌진은 북로 군정서의 총사령관을 맡게 됐다.


인사이트청산리 전투 승리 기념 사진 / 국가보훈처


3·1 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돼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했다.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홍범도와 최진동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섬멸했다.


이것이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한 봉오동 전투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간도에 출병하게 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부대와 일본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인사이트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해 퇴각하는 일본군 / 연합뉴스 자료사진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 휘하 부대는 서로 힘을 합쳐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수천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청산리대첩 후 그는 대한독립군단 조직, 신민부 조직, 성동사관학교 설립 등 독립군 조직 구성해 매진했다.


이 시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김좌진은 공산주의는 멀리했다.


인사이트장군이 암살당한 정미소 앞의 기념 흉상 /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려공산당 청년들에게 김좌진은 방해세력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목숨을 거뒀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럽다"고 말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했다.


"오늘(26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3번의 역사적 승리를 거둔 날"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앞잡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오늘, 한반도에는 또 다른 쾌거들이 일어났다.


"오늘은 청산리 대첩의 '영웅' 이범석 장군이 서거한 날입니다""조국,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강력한 감동과 영향을 주는 말은 없다"


배다현 기자 dahyeo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