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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3·1 운동 당시 일본인들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 4가지

3·1절에 맞춰 당시 일본의 잔혹한 만행을 살펴보고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우리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야 할지 생각해보자.

인사이트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서대문형무소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2019년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각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에 우리나라의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독립에 대한 꿈을 키웠다. 3·1 운동이 펼쳐진 이유다. 


인사이트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스틸컷


3·1 운동에 맞춰 작성된 '기미독립선언서'에는 "自由的精神(자유적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感情(배타적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는 공약이 있다. 


일본이 한국을 억압했으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며, 폭력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를 향한 일본의 탄압은 비인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 정도가 심해 해외에서도 일본의 만행을 비판했다. 


3·1절에 맞춰 당시 일본의 잔혹한 만행을 소개한다. 


당시 우리 민중의 뜻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생각하며,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우리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야 할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1. 여학생을 발가벗기고, 심문하고, 고문하고, 학대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스틸컷


지난 2015년 4월 26일 3·1운동과 관련한 미국 교회연합회의 문서가 발견됐다. 


'한국의 상황(The koreanSituation)이란 제목의 27페이지짜리 보고서로 3·1운동 이후 일본이 벌였던 잔혹한 성고문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본 문서에는 "일본 경찰이 젊은 여성과 여학생을 발가벗기고, 심문하고, 고문하고, 학대했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강간'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인사이트서대문형무소 여옥사 /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이는 경찰서에서 성고문은 물론 강간까지 자행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22년 3월 5일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기사도 이를 뒷받침 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의 소녀들은 일본 장교 앞에서 발가벗도록 강요받았다. 


기사는 당시 소녀들이 대부분 14~15세였으며 간혹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고도 전했다. 


2. 일본 경찰은 태극기를 든 학생의 양팔을 칼로 잘랐다. 


인사이트중국신문한국독립운동기사집(Ⅱ) - 3·1운동 편


1919년 4월 12일 중국의 신문 '국민공보'는 '일본인이 부녀를 능욕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어린 소녀의 팔을 잘랐다.  


소녀가 이에 굴하지 않고 왼손으로 태극기를 든 후 다시 만세를 외치자 일본 경찰은 그녀의 왼손마저 자르고, 가슴을 찔러 살해했다. 


인사이트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팔이 잘려나간 윤형숙 열사 /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만세 행진에 앞장섰던 윤형숙 여사 또한 일본 경찰의 칼에 왼팔을 잃었다.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이었던 윤형숙 여사는 1919년 3월 10일 1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왼팔을 잃고 체포됐고, 그 과정에서 한쪽 눈까지 잃었다.   


3. 가족의 삶을 파탄냈다. 


인사이트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스틸컷


지난해 12월 31일, '한겨레'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82.2%가 3·1운동과 관련해 떠오르는 인물로 유관순을 꼽았다. 


그만큼 유관순은 많은 사람의 뇌리에 3·1운동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영웅' 뒤에 감춰진 그의 가족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인사이트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스틸컷


1919년 4월 1일 독립운동에 나섰던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 열사와 이소제 열사는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살해됐다. 


유관순은 부모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고, 그녀 또한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 18세 꽃다운 나이에 삶을 마쳤다.


한순간에 동생과 부모를 잃은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이후에도 독립운동하고 투옥되기를 계속하며 남은 어린 두 동생을 키웠다. 


4. 제암리 학살 사건


인사이트제암리 교회 학살 방화 후 현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뜨거운 불꽃처럼 번져 전국으로 퍼졌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화성시 향남읍)에서도 약 1천 명의 주민이 만세 시위운동을 진행했다. 


일본 헌병들이 출동해 시위 주도자들을 사살하고 체포해 고문까지 했지만, 이들의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일제의 탄압에 흥분한 주민들이 일본인 주택과 학교에 불을 지르면서 시위 양상이 과격해져 갔다. 일본 헌병이 과격 진압을 하면 주민들은 시위를 하면서 일제의 만행에 항거했다. 


인사이트희생자들을 구분할 수 없어 함께 매장한 23위지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가운데, 4월 5일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는 "만세 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해 사과하겠다"라며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교회 문에 못을 박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다. 창을 넘어 교회당을 탈출하려 한 사람에게는 총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보복'이었다.


한 여인은 품에 있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창문 너머로 아이를 던졌지만, 일본 군인은 그마저 총검으로 찔러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날 교회당 안에서 뜨거운 불과 총탄에 학살당한 주민이 23명, 교회당 밖에서 살해당한 인원이 6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