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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눈물 참으며 아들 '종아리'를 때린 사연

곽낙원 여사는 사람들에게 생일을 알린 것은 경솔하고 잘못된 일이라며 50세가 넘은 아들 김구를 회초리로 때렸다.


인사이트(좌)김구와 어머니 그리고 두 아들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우) 백범 김구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임시정부였지만, 1920년대 자금난에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26년 김구의 50번째 생일이 오자,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것으로 유명한 '나석주'는 고기와 반찬거리를 사 왔다.


자신의 옷가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생일을 맞이한 김구를 위해 사 온 음식들이었다.


이를 본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일을 챙기는 게냐!"라며 크게 나무라고는 반백 살 된 아들 김구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경솔하게 생일을 알려 동지를 헐벗게 했다는 이유였다.


인사이트백범 광장 곽낙원 여사 동상 /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훈터'


그녀의 생일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임시정부가 중국 난징 옮겨가 생활할 때였다.


임정 요원들은 곽 여사의 생일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곽 여사는 엄항섭을 불러 모든 돈을 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직접 만들어 먹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생일날을 맞이한 곽 여사는 임정 요원들을 불러놓고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보자기 안에는 권총 두 자루가 있었다. 받은 돈으로 생일상을 차리는 대신 권총을 산 것이다.


곽 여사는 "이 총으로 왜놈들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라고 말했다.


인사이트1921년 임시정부 요원들 / 한국학중앙연구원


곽 여사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원 모두의 '어머니'였고 스승이었다.


없는 살림에 독립운동하는 임정 요원들 배는 굶게 안 하려고 늦은 밤 중국인들이 버린 채소를 주워와 시래깃국을 끓여가며 배를 든든하게 채워줬던 그녀였다.


얼마나 강인했던지 아들이 1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을 땐 "나는 네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것이 경기 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인사이트광복 후 임시정부 귀국을 환영하는 국민들 / 한국학중앙연구원


1939년, 곽 여사는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 충칭에서 별처럼 빛나던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82세였다. 연로한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와 단 한 번 편안한 삶을 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 그녀는 아들 김구를 불러 "창수(김구 본명)야.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리 나라의 독립을 실현해다오. 애미는 그날을 볼 수 없겠지만 네가 성공해서 돌아가는 날, 나와 아이들 어미(김구 부인 최준례 여사)의 유골을 갖고 돌아가 고국 땅에 묻어다오"라고 말했다.


김구는 어머니의 죽음에 "불효자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하시다 이렇게 돌아가셨다"라며 통곡했다.


곽 여사의 유해는 충칭 인근 화상산에 묻혀 있다가 광복 후 1948년 손자 김신에 의해 한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