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윗도리에 깜장 바지"···5·18 때 잃은 8살 아들 40년간 찾아 헤맨 이귀복 씨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화려한휴가'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광주의 슬픔이 여전히 남아 있고, 오늘(18일)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을 맞이한 가운데 그 이야기들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8살 아이 창현 군을 잃어버린 이귀복 씨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점령한 그때 사라진 창현 군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인사이트이귀복 씨 / Youtube '비디오 머그'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다음 날인 19일 창현 군이 다니던 광주 양동 초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씨는 전남 완도까지 가서 건축업에 몸담고 있었고 그의 아내 역시 빠듯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화장품 외판원으로 일했다. 


19일 이씨와 그의 아내가 비운 집에는 첫째 딸과 둘째 창현 군만 남았다. 홀로 남아 있던 창현 군은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그 위험천만한 밖으로 향한 후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온 이씨의 아내는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들을 애타게 찾았다. 


인사이트


인사이트5·18 기념재단


"초록색 윗도리에 깜장 바지"


그날 창현 군의 어머니가 목이 쉬어라 외치며 길을 가던 시민들에게 물었던 그 질문은 도청 앞에서 만난 군인들에게도 건네졌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디찼다. 군인들은 "집 나간 아이를 찾으려 하지 말고 집에 있는 자식 관리나 잘하라"고 쏘아붙였다.


이 말을 듣고 공포에 질린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남은 자식들을 꼭 끌어안았다.


인사이트5·18 기념재단


뒤늦게 완도에서 광주로 돌아온 이씨도 창현 군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로 아들을 찾아 나섰다.


그때만 해도 그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 이토록 오래 이어질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던 중 1989년 5·18 유족회가 발간한 '광주민중항쟁 비망록'이라는 책 1면의 사진 속에서 이씨는 단번에 총상을 입은 채 숨진 창현 군을 알아봤다.


피로 물든 광주 광장에서 이제 막 8살 난 어린 창현 군도 목숨을 잃었던 것. 이후 아들 시신이라도 찾겠다며 40년 동안을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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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1980년 5월 19일 행방불명 된 이창현 군 / Youtube '비디오 머그'


그 사이 생활고로 힘들어하던 아내는 남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떠났고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창현 군은 1994년 5·18 민주화운동 행방불명자로 기록됐다.


3년이 흐른 1997년 5월 4일 국립 5·18 민주묘지 내 행불자 묘역에 창현 군의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에는 창현 군의 넋을 위로하는 '이창현군의 령'이라는 글자가 적혔다. 


'7세의 나이로 학교를 다닌 지 2개월 만에 M16 총상·공수부대·내 아들 창현이를 아버지 가슴에 묻는다'


묘비 뒤에는 아들을 가슴에 묻은 이씨의 글귀가 새겨졌다. 


인사이트Youtube '비디오 머그'


지난 2018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 자리에 참석한 이씨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심정이다. 이렇게라도 해주셔서 내 마음이 기쁘다. 오늘 우리 아들 죽은 뒤로 내 마음이 처음으로 흐뭇하다"고 울음에 잠긴 목소리를 힘겹게, 꿋꿋이 옮겼다.


당시 기념식에서는 배우 남경읍 씨가 무대에 올라 이씨의 이야기를 지현했다. 


기념식장을 찾은 사람들 사이에 울려 퍼진 "우리 창현이 못 보셨어요?"라는 남 배우의 외침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YouTube '비디오머그 - VIDEOM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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