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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이국종들'을 위하여

환자를 생각하며 싸우는 이국종과 그와 함께 하는 팀원들의 고군분투가 끊어지면 우리 사회의 '안전'의 한 축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사이트흐름출판


[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환자들은 늘 밀려오고 밀려갔다. 대학 병원에서 떠밀린 환자들이 다시 준종합병원으로 향할 때, 일부는 간신히 적절한 치료를 받았으나 많은 경우는 죽음을 맞이했고, 숨을 잃은 자들은 영안실로 옮겨졌다. 그곳은 마지막 종착지였다"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왼손을 허리에 대고 있다. 어깨는 축 내려가 있고 고개는 숙인 채다. 오직 그의 오른손만이 살짝 쥔 모양새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고 있는 듯하다.


지친 뒷모습의 남자는 외상외과 의사 이국종이다.


그는 아덴만에서 총탄으로 죽어가던 석해균 선장을 살린 영웅이며 지난해에는 빈사 상태의 북한 군인마저 살려낸 한국의 명의 중 한 명이다.


'골든아워'를 읽으며 알게 됐다. 이국종은 곧잘 '영웅' 칭호를 듣지만 사실 누구보다 그 이름을 듣기 싫어할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대신 동료들에게 '고맙다', '감사하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유독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부류라면 제 잇속만 차리는 정치계·의료계 인사 정도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Facebook '비디오머그 - VIDEO MUG'


최근에는 무전기(인터컴)에 언성을 높이는 모습이 한 방송사의 페이스북 영상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이거 안된다니까! 거지 같은 거!" 무전기를 집어던지는 그의 행동에 울분이 묻어있었다.


이국종은 8년째 무전기를 지원해달라고 했지만 말뿐인 공허에 그쳤다며 정부의 진정성 문제를 꼬집었다.


지난 5월, 아주대학교 병원 외상센터에 7년 만에 '닥터헬기'를 확보했을 때만 해도 우리는 이렇게 화가 난 이국종을 보리라 생각지 않았다.


인명 구조를 위해 어디든 안전히 날아가 환자를 실어 올 수 있는 닥터헬기까지 받았으니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현실은 '가시밭길'이었다. 그럴싸한 닥터헬기는 모셔올 수 있었지만 인력 충원은 없었다.


워라벨을 외치는 사회에서 이국종은 팀원들을 과로로 쓰러지게 하고, 잦은 현장 출동으로 손가락이 으스러지고, 다리를 다쳐 절뚝여도 수술받는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나쁜 센터장이다.   


인력 충원도 넉넉한 지원도 없었지만 모든 잘못은 센터장인 그의 몫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구하러 가는 헬기가 '소음'이라는 민원도 그가 견뎌내야 하는 뒷말 중 하나였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뉴스1


"2009년, 외상외과에 혼자 있을 때 1년간의 적자는 8억 원을 넘는 수준이었다. 2010년 정경원이 합류해서 열심히 진료하고 수술하니 불과 8개월 만에 적자가 8억 원을 넘어섰다. 권준식 등이 합류하고 헬리콥터를 이용해 중증외상 환자의 집중도가 증가하자 적자는 더 늘어났다"


이국종의 화가 8년 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외상외과를 시작하며 켜켜이 쌓여왔다.


고된 일을 해도 그와 팀원들은 병원의 골칫덩이이자 욕받이였다. 그들은 환자를 받기 위해 없는 자리를 내기 위해, 헬기 소음을 사과하며 계속해서 고개 숙이고 애원해야 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퇴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잠잘 시간도, 밥 먹을 시간도 줄여가며 일했다. 그러는 동안 모두 견딜 수 없는 한계에 근접해갔다.


그와 팀원들이 환자 사이에서 부서지고 깨지는 동안 의료계 권력들은 정부 지원을 받은 중증외상센터를 돈 되는 다른 과로 바꾸려 골몰했다.


국민들의 애정을 먹고 사는 정치인들도 언론 보도가 사라지자 금세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덩그러니 남아 모든 피로를 짊어지고 환자를 봤고, 살려냈고 때로 아픈 죽음을 견뎠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뉴스1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공사관련 일들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다"


'골든아워' 1권은 2002~2013년까지, 이국종이 적을 둔 아주대학교 병원이 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기 이전을 다룬다.


2권은 2013~2018년까지의 일로 권역외상센터 지정 이후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1권에서 노력·의지·기개 등이 느껴진다면 2권을 읽으며 느낀 감정은 좌절·피로·한계다.


지속된 노력으로 의료수가를 올려 적자를 면했지만 주변의 평가는 여전히 '적자 부서'였고 외상외과 앞으로 오는 기부금마저 다른 과에서는 나눠 쓰지 못한다고 입을 내밀었다.


아주대학교병원이 권역별 중증외상센터로 지정되고 건물이 차근차근 지어졌지만 그의 속에는 더욱 마른 바람이 불었다.


격무로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스텝들의 휴식공간을 꼭 마련하고 싶었지만 보직교수는 다른 과와의 형평성을 이유로 반 이상을 빨간 줄로 그어버렸다.


센터장이 됐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함께 외상외과의 기초를 다졌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갔다.


권역외상센터 센터장이라는 근사한 허울 아래 그는 팀원들과 함께 오히려 둥둥 뜬 섬이 되었다.


아무데도 기댈 곳 없는 그의 체념은 울분이 되어 터져나왔다. 앞서 무전기를 던진 이국종의 모습은 그 울분의 표현일 것이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죽음이란 누구에게든 동일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오지는 않는다. 나는 버려진 죽음을 수없이 보아왔다"


외상외과에 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돈이 없는 환자들이다.


제대로 된 보호장비를 갖추지 못하고 위험한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악취가 나고 몸에 심각한 결함을 일으킬 수 있는 약품을 맨손으로 만져야 한다.


이들은 돈이 없어 죽음으로 한없이 내몰린다. 이국종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을 지난 9월 만났다.


'어서 와 공장은 처음이지'를 주제로 현직 의사인 김철주 노동건강연대 정책위원이 말했다.


그는 지금과 같이 현장 노동자의 교육·상담이 먼저가 아니라 기업 상담이 먼저라고 했다.


노동자는 돈에 휘둘리기 마련이라 자신을 보호하기 힘들다. 대신 자본과 여력이 있는 기업이 안전한 상황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의미로 권역외상센터는 국가가 지원해야 할 사항이다. 자본을 벌어들일 자원이 자신의 몸뿐인 노동자에게 지금 국가가 아닌 수많은 '이국종들'이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고 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뉴스1


"세월호 침몰을 두고 '드물게' 발생한 국가적 재난이라며 모두가 흥분했다. 나는 그것이 진정 드물게 발생한 일이라 국가의 대응이 이따위였는지 알 수 없었다"


2권 말미에 이국종은 부록으로 선진국 수준의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모은 '인물지'를 실었다.


외상외과 팀에 처음으로 합류한 정경원, 캐나다에 가려다 발목 잡힌 김지영, 선의로 팀에 합류했다 250종이 넘는 서류를 단독 처리하게된 6급 공무원 김태연 이외에도 백숙자, 김주량, 김효주, 윤상미, 전은혜, 송미경, 김윤지, 이수현 등 수많은 이국종들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절대 영웅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절규에 가깝다.


이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가 쓰러져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제 선진국형 '시스템'을 위해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길고 지루한 싸움을 이제 우리가 함께 이겨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