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 서울
  • 15 15℃ 인천
  • 13 13℃ 춘천
  • 10 10℃ 강릉
  • 15 15℃ 수원
  • 17 17℃ 청주
  • 17 17℃ 대전
  • 13 13℃ 전주
  • 17 17℃ 광주
  • 16 16℃ 대구
  • 15 15℃ 부산
  • 16 16℃ 제주

임진왜란은 조선 시인을 중국에 소개한 진짜 한류의 시작이었다

왜구의 침략으로 괴로워하던 7년여간의 시간 동안은 조선 문인들이 밖으로 발돋움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관상'


[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일찍부터 풍문을 듣고 족하를 흠모해온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상에 놓인 시편을 보여주었더니 서로 돌아가며 한번 읽어 보며 아쉬운 대로 족하와의 만남을 대신할 만했습니다"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어 책상에 시편을 붙이고 돌아가며 읽어본다.


길에 나와 기다리며 환영 인사를 하고, 시를 받기 위해 며칠 동안 숙소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받은 시를 자랑하러 다닌다.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구국의 문장가로 불렸던 이정귀(1564∼1635년)를 향한 당시 명나라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위의 글은 마치 지금의 한국 아이돌을 기다리는 어느 한류팬을 묘사한 글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사이트이정귀 친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알고보니 선조 25년(1592년)부터 31년(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뤄진 일이었다. 주인공은 문장가로 유명했던 조선의 사대부 이정귀.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7년 동안 조선은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만큼 양국의 문화적 교류도 활발해졌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6년(1914년) 9월 기록에 따르면 "방금 예조 낭관 권척이 와서 말하기를 '차관의 요구사항 중에 가장 긴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시문이다'"라고 되어있다.


중국에서 금은보화나 특산품인 인삼이 아닌 바로 '시문'을 원했던 것. 당시 이정귀의 문장은 중국 선비는 물론 깊은 산속 승려까지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인사이트(좌) 한빛비즈, (우) 임진왜란 중 3대 대첩으로 손꼽히는 한산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 전쟁기념관


해당 이야기는 '퇴근길 인문학 수업: 멈춤' 중 한 대목이다. 책에서 저자는 '임진왜란, 한류의 시작'이란 제목으로 당시 찬란하게 빛났던 우리 문화를 소개했다.  


이정귀 외에도 당대 문장가인 허균, 유몽인, 이수광, 신흠, 이안눌, 차천로 등의 문인들이 명나라에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대부뿐만 아니다. 


1599년 명나라 오명제에 의해 전해진 '조선시선'에 허난설헌의 시 또한 알려졌다. 이후 중국의 많은 문인들이 그녀의 시를 애송하고 난설헌의 시를 담은 '경번집(景樊集)'을 출간하기도 했다. 


허균은 자신이 시를 쓰는 목적이 중국의 유명한 문장가인 이백과 두보를 닮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당당한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조선 문인들.


그들은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된 명나라 선비들마저 반해버릴 글을 발표해 원조 한류 아이돌로 이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