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 서울
  • 15 15℃ 인천
  • 13 13℃ 춘천
  • 10 10℃ 강릉
  • 15 15℃ 수원
  • 17 17℃ 청주
  • 17 17℃ 대전
  • 13 13℃ 전주
  • 17 17℃ 광주
  • 16 16℃ 대구
  • 15 15℃ 부산
  • 16 16℃ 제주

올해 97살 인생 선배 이옥남 할머님에게 보내는 편지

어린 시절 글도 못 배우고 한평생 일만 하던 할머니가 글씨 예쁘게 쓰기 위해 30년 동안 적어간 일기 151편이 책이 되어 나왔다.

인사이트(좌) 양철북, (우)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2 '제보자들'


[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이옥남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하영이라고 합니다"


강원도와 서울. 마음 같아서는 찾아뵙고 싶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생면부지의 타인이 "선배님~"하고 반가워하면 놀라실까 봐 글로 인사드립니다.


요 며칠 서울은 하늘이 높고 푸른 완연한 가을 날씨였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다가도 점심때는 선풍기가 필요할 만큼 더워 저는 다소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는 밤이 좀 더 춥겠지요? 추수의 계절 가을인데 벼는 물론이고 깨, 콩, 수수 모두 잘 거두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곡식 추수가 좀 덜 돼도 마음만큼은 배부르지 않으실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곡식 수확하듯 글쓰기 인생 30년 만에 당당히 책의 저자가 되셨으니까요.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2 '제보자들'


저는 이런저런 일을 하다 이제 글만 쓰게 된 지는 2년이 채 안 됐습니다. 


그러니 30년간 꾸준히 일기 글을 써오신 할머님은 제게 하늘같은 선배님이 되시지요. 


숨쉬기는 가만히 있어도 되죠. 하지만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글쓰기가 어디 쉽나요. 


읽어야 하지, 생각해야 하지, 감동해야 하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동안에는 글씨 한 자 쓰기가 힘든 것이 글쓰기더란 말이지요. 


글쓰기 부스러기에 반백년도 살지 않은 제가 너무 주제넘었지요. 


그래서, 더 열심히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2 '제보자들'


선배님 일기를 읽으며 혼자 빙그레 웃은 일도 많습니다. 


버들강아지는 '봉실봉실' 피어있고, 동백꽃은 봉오리를 '바름바름' 내민다 쓰셨잖아요. 


요즘엔 잘 쓰지 않는 그 표현들이 눈에 그린 듯한 봄의 모습 같았어요. 장면을 상상하며 혼자 입꼬리를 늘이며 웃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재주 뛰어난 선배님이 제대로 글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66살 넘어서라는 사실을 알고 슬펐습니다. 


무서운 친정아버지 밑에 살다 17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 이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엄한 그늘 아래 사셨다지요. 


서슬 퍼런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들었습니다. 


저희 할머니 세대처럼 그때는 여자라서 힘든 일이 더 많았던 것 같아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도 아궁이에 불을 때다 재를 긁어 글자를 쓰던 한글을 이제 마음껏 쓰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2 '제보자들'


30년간 꼬박꼬박 기록하신 일기 속에는 농사일과 함께 유독 얼마를 쓰고 벌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나물을 캐다 팔고, 망태와 삼태기를 만들어 팔고, 콩을 키워 파신 돈을 소중히 여기시며 당시 얼마를 썼다는 기록 또한 자세합니다. 


매번 돈 버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시지만 가족에게 폐 되지 않게 손수 밥벌이하시겠다는 의지 또한 대단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애써 번 소중한 돈을 스스로 쓸 때도 아끼고 아끼셨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보내는 성금은 아끼지 않으셨지요. 


버스비 800원까지 꼼꼼히 적으시는 분이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때는 성금으로 거금 10만원을 내놓으신 걸 보았습니다. 


돈 아깝다는 말 한마디 없이 유가족들 마음만 내내 걱정했던 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2 '제보자들'


그 외에도 다른 사람 돕는 일에는 인색한 법이 없으셨어요. 


무언가를 받으면 꼭 고맙게 생각하고 보답하려 하는 모습도 일기에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사실 제가 '선배님'이라고 부른 이유는 오래 글을 쓰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힘든 세월을 겪으셨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진짜 눈물 흘릴 수 있는 모습에서 진정한 인생 선배의 모습을 봤습니다. 


앞으로 제가 선배님 나이가 되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나이의 3배도 넘는 세월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 제가 97살까지 살 수 있을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선배님처럼 살아야지 하는 꿈은 생겼습니다. 


얼마 안 된 인생이지만 제 잇속 차리려 아무렇지 않게 남을 속이고 헐뜯으며 사는 사람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원래 인간의 삶이라 생각할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선배님을 보며 그렇지 않은 삶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쑥스러운 편지가 너무 길어졌네요.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건강 유의하세요.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