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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금 '200억' 포기하고 '백범 김구'에게 피난처 제공한 중국인

중국인 저보성 선생이 백범 김구 선생을 위해 엄청난 현상금을 포기하고 양아들의 집을 피난처로 내준 일화가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인사이트] 진민경 기자 = 일제의 지독한 탄압에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죽을 각오로 대항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백범 김구 선생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름 두 자다. 하지만 그의 목숨을 지키려 엄청난 상금도 마다했던 중국인에 대해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바로 평소 김구 선생과 어떤 연고도 없던 저보성 선생이다. 


저보성 선생은 스스로는 물론 가족들까지 총동원해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왔다.


저보성 선생은 무슨 이유로 김구 선생을 도운 걸까.


인사이트저보성 선생 / Youtube 'OhmynewsTV'


두 사람의 인연은 윤봉길 선생의 '도시락 폭탄'에서 기인한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자, 전 세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에 주목하게 됐다.


동시에 일제가 임시정부는 물론 소속 요원들을 추적하는 빌미를 제공한 일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선생은 일제의 표적이 됐고, 하루가 멀다하고 포위망은 좁혀졌다.


하는 수 없이 김구 선생은 고달픈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 외무성과 조선 총독부, 상하이 주둔군 사령부가 김구 선생에게 내건 현상금은 60만 원.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200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인사이트저보성의 양아들 첸둥성 / Youtube 'OhmynewsTV'


이렇게 되자 김구 선생과 가까이 지내던 이들까지 돈에 눈이 멀어 '밀정'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때 저보성 선생이 나섰다.


그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간부였으며 상하이 법과대학 총장이자, '항일구원회'라는 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저보성 선생은 현상금 유혹을 뿌리치고 김구 선생에게 어떤 대가도 받지 않은 채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그는 중국 저장성 자싱시에 있는 한 집을 김구 선생을 위해 내줬다. 양아들 첸둥성의 집이던 '매만가 76호'를 피신처로 쓰도록 한 것이다.


인사이트매만가 76호 / Youtube 'OhmynewsTV'


이곳은 집 뒤편에 선착장이 붙어 있어 일제의 추적으로부터 언제든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기도 했다.


저보성 선생은 일제의 감시망이 점점 더 좁아지자 며느리인 주자루이에게 김구 선생을 부탁하기도 했다.


며느리 친정의 별장을 김구 선생의 은신처로 쓰도록 했다.


이런 도움이 있었기에 김구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광복이 이뤄졌다.


이후 김구 선생은 해방 후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와줬던 주자루이를 향해 존경의 마음을 담은 글을 전하기도 했다.


또 1997년 대한민국 정부가 저보성 선생을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인사이트김구 선생을 도운 저보성 선생 일가 / Youtube 'OhmynewsTV'


80여 년이 지난 지금, 김구 선생과 저보성 선생의 우정이 담긴 매만가 76호는 인근에 사는 중국인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한국인 방문객은 한 달에 100여 명 남짓. 우리의 관심이 사라지면 이곳도 언젠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을 뿌리친 것은 물론 목숨을 걸고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을 든든하게 지켜줬던 저보성 선생의 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 지역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잊지 말고 매만가 76호를 찾자. 외로운 타지에서 대한민국의 독립만을 생각했을 김구 선생의 마음이 녹아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