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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전 오늘, '실미도' 탈출한 무장 군인들이 서울 시내를 점령했다

실미도를 탈출한 31명의 무장 군인들은 시내 버스를 탈취해 서울 대방동까지 진격했지만 그곳에서 전원 사망했다.

인사이트영화 '실미도'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내레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


1968년 1월,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북한 특수부대가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해 온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들은 수류탄과 기관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대부분 사살되며 소탕됐다.


북한군이 청와대 코앞까지 온 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북한에 복수하기 위해 '김일성 암살'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만들어진 특수부대, 바로 '684부대'다.


인사이트영화 '실미도'


같은 해 3월 충북 옥천에서 젊은 청년 7명이 실종됐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들을 애타게 찾았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들이 모습을 보인 곳은 바로 '실미도'. 684부대의 비밀 훈련 장소가 있던 곳이었다.


이들 외에 젊은 남성 31명이 실미도로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시골의 순박한 농민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조폭, 살인자 등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미도에 모인 이들은 이곳에서 지옥 훈련을 받으며 김일성 암살을 위한 정예 요원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인사이트영화 '실미도'


그 사이 남북 관계는 급속도로 화해 분위기로 전환됐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대화·협력을 통한 평화통일 구상 선언'을 발표했고, 1971년 8월 12일에는 북측에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84부대의 필요성은 잊혀 갔다. 김일성 암살 계획은 점점 뒤로 밀려났고, 대우도 나빠졌다. 이럴 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썼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있던 교관과 조교들은 섬을 떠났고, 처음 보는 기간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소리소문없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684부대원들을 덮쳐오고 있었다.


인사이트영화 '실미도'


결국, 이들은 '김일성'이 아닌 '박정희'를 죽이겠다며 1971년 8월 23일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실미도에서 교관과 감시병 18명을 살해한 이들은 인천 옥련동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이들은 총격전을 벌이며 서울 영등포구(현재 동작구) 대방동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군 병력과 대치한 이들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춰서게 된다. 


총격이 이어지던 끝에 이들은 결국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4명이 살아남았으나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됐다.


부대원 31명 전원 사망이었다. 


인사이트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당시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며 이 사건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이들의 실체가 점차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무려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유족들은 자신의 아들, 형제, 오빠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고 살다가 지난 2006년이 되어서야 공식 사망 통보를 받았다. 


이곳에 있던 자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왜 숙련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특수부대 요원으로 선발해야 했는지, 왜 살아남은 이들의 사형(총살)을 빠르게 집행했는지 등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중 명백한 사실은 단 하나, '실미도 사건'은 결국 남북의 분단과 냉전체제가 낳은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