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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시해한 암살범 10년 동안 뒤쫓아 응징한 29살 청년

백범 김구를 시해한 암살범을 처단하기 위해 10년간 그 뒤를 쫓은 투사가 있었다.

인사이트'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 칼 마이던스 / LIFE 1949년 7월호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죽이지는 못했다" 살인미수로 붙잡힌 청년이 한 말이다. 


73주년 광복을 맞이한 오늘(15일)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 지도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 한 청년의 사연이 조명되고 있다.


69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백범은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었던 암살범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깊은 슬픔이 나라 전체를 뒤덮었다. 해방 이후 거행된 우리나라 최초 국민장에는 100만여 시민이 몰려 마지막까지 김구 선생과 함께했다. 


그곳에는 한 어린 소년도 있었다. 독립운동가를 가족으로 둔 애국 집안 출신의 소년이었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곽태영은 이때부터 "안두희를 죽여야겠다"는 각오를 새겼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뒤 암살범 안두희의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추적을 시작했다.


어린 소년이 장성하는 동안, 암살범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석 달 만에 15년 형으로 감형되더니 결국 사면돼 2계급 특진을 하고 6.25 전쟁 때 포병 장교로 복귀한다.


제대 후에도 군납 공장 등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어들였다. 이에 안두희가 최고 배후 세력의 지시를 받아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짙어지기도 했다.


그런 의혹 가운데서 안두희는 당시 커다란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세운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었다.


추격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던 해가 돼서야 안두희의 주거지를 알게 된 29살 청년 곽태영. 그다음 행보는 예정대로였다.


인사이트백범 김구 장례 행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을에 잠입한 곽태영은 장사꾼으로 보이기 위해 실제 그렇게 보이려고 여러 민가에 양말, 장갑 등을 팔았다. 그러면서 안두희의 거취를 살폈다.


1965년 12월 22일 아침, 세수하려고 목에 수건을 걸치고 앞마당으로 걸어 나온 안두희의 앞에 곽태영이 서서 외쳤다. "백범 선생님의 시해 배후를 밝혀라!"


곽태영은 이어 준비한 흉기와 돌을 휘둘렀고 안두희는 이내 의식을 잃었다. 안두희가 숨졌다고 생각한 곽태영은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 만세! 남북통일 만세! 3천만 국민 만세!"를 외쳤다. 직후 경찰에 체포되고 나서도 "3천만 국민의 원한을 풀어서 통쾌하다"고 밝혔다.


스물아홉 살 청년의 의분과 결단에 국민은 뜨겁게 들끓었다. 120만 명이 "애국 청년 곽태영을 석방하라"며 탄원서를 냈다. 


곽태영의 가족에게는 아들이 장한 일을 했다는 격려 편지가 1만여 통 쏟아졌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벌였다.


인사이트안두희 생전 모습 / KBS1


그러나 안두희는 살아남았고, 곽태영은 1966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곽태영은 석방된 이후 일제 잔재 청산 등 사회 운동에 앞장서다 2008년 12월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한평생 사회운동가로 살아온 곽태영은 생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민족의 반역자가 어떻게 단죄받지 않고 이 땅에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백범을 암살한 지 16년 만에 곽태영의 피격으로 처음 응징을 당하게 된 안두희는 이후 가명을 쓰며 숨어지내다 1996년 10월, 자택에서 한 시민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죗값을 받는 데까지 47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