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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전 오늘(6일),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73년 전 오늘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떨어뜨렸다.

인사이트(좌) 온라인 커뮤니티, (우) gettyimageskorea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미군의 폭격기 B-29가 일본 히로시마의 상공에 나타났다. 폭격기에는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실려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일상 속 하루를 맞이한 히로시마 시민들은 상공에 떠 있던 한 대의 B-29 폭격기를 그저 미군의 '정찰용 비행기'라 생각했다.


그 누구도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실행 명령이 내려지자 9,750m 상공에서 떨어진 단 한 발의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중심부 580m 상공에서 폭발했다. 


폭발 지점에서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것들이 파괴됐고,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 약 34만 명 중 약 14만 명이 초기 폭발 및 방사능 피폭 등으로 사망했다.


인사이트'리틀 보이' / wikipedia


사실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에도 일본의 상황은 암울했다. 일본 해군은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었고, 많은 일본 국민들이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일본의 강점 아래 있던 우리나라도 일본의 전쟁으로 인한 폐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많은 젊은이가 전쟁터로 끌려갔고, 이역만리 타지의 전쟁터에서 꽃 같은 청춘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기득권은 오로지 '덴노'만을 외치며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총 결전을 준비하며 본토에서의 항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사이트에놀라 게이에서 촬영한 '리틀 보이'가 일으키는 버섯 구름 / wikipedia


급기야 그들의 잔혹성은 자살 공격 '가미카제'와 같은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이에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이런 일본을 점령하는 데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의 희생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야욕을 멈추고 장병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인사이트


인사이트gettyimagesKorea


하지만 이미 광기로 차 있던 일본은 14만 명의 시민이 죽었음에도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고, 이에 미국은 8월 6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Fat man)'을 투하할 수밖에 없었다.


'팻맨'의 폭발과 함께 또다시 약 8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인제야 원자폭탄의 위력을 깨닫게 된 일본은 6일 후인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군국주의'라는 미명하에 자국민 22만 명을 희생시킨 후였다.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고, 제2차 세계대전도 끝이 났다.


인사이트gettyimageskorea


한편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도 피해를 봐야 했다. 


당시 징용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약 7만 명이 피폭을 당한 것인데, 히로시마에서는 피해자 5만 명 중 3만 명이 넘게 사망했으며 나가사키에서는 2만 명 중 1만 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단지 조선인이란 이유로 일본 병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고, 이 때문에 조선인들의 사망률이 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