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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역 사망 사고' 책임을 비정규직 청년에게 미루지 말라

지난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의 책임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경찰이 제대로 된 사고 원인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려줄 것을 촉구한다.

31일 기자회견 하는 구의역 사망 사고 희생자 어머니 /연합뉴스

 

[인사이트] 정은혜 기자 = "보고를 안한 우리 아이의 과실이라니…"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다 사망한 19살 청년의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그는 "저는 지금도 아들이 피투성이로 누워있다는 것을 못 믿겠다"며 "회사에서는 지킬 수 없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우리 아들의 과실로 만들고 있다. 보고를 안한 우리 아이의 과실이라고 한다"며 원통해했다.

 

지난 28일 혼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사망한 청년은 컵라면을 들고 다니면서 끼니를 떼웠다. 2인 1조 매뉴얼이 지켜질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날도 수리를 하러 현장에 뛰어갔다.

  

전동차로부터 시민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게 스크린도어의 역할이지만, 그 스크린도어는 이땅의 비정규직 청년을 지켜주지 못했다. 

 

동차 사이에 끼어 세상을 떠난 19살 청년은 '하청업체 노동자'라는 또다른 계급에 속해 있었다. 

  

연합뉴스

 

이같은 일은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 비일비재하다.

 

지난 2014년 월성원전 3호기에서는 취수구 물막이 설치작업을 하던 잠수부가 취수 펌프에 빨려들어가 즉사했다. 취수 펌프에 안전망도 설치하지 않은 채 잠수부를 투입한 것이다.

 

동료들이 1박 2일이나 취수구 주변을 수색한 결과 고인의 시신 중 겨우 5%를 찾을 만큼 끔찍한 사고였다. 

 

원청 업체는 한국수력원자력. 하청 노동자에게 위험한 일을 시킨 주체는 공기업이지만 사고의 책임은 지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하는 데 있어서 '누가 잘못을 했는지'를 명확하게 가릴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수원 사고 잠수부 유족의 시위 모습/ 사진 제공 = 노동건강연대

 

이렇게 거대한 '시스템'이 가해자가 될 때 힘 없는 피해자는 더 원통한 상황에 처한다. 

 

책임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고의 피해를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강남역에서 일어난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고 원인으로 '매뉴얼 부재', '안전불감증' 등이 지목되면서 노동자들이 매뉴얼을 지킬 수 없게 하는 시스템을 개선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여론이 조용해지자 진정한 책임 주체를 가리는 일은 흐지부지돼 버렸다.

 

이번에도 서울메트로는 "희생자가 보고를 하지 않았다", "매뉴얼이 지켜지지 않았다" 등의 말로 사고 책임을 은근슬쩍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있다.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이번 사건 또한 한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 

 

ytn

 

그런 가운데 경찰이 "일반 형사 사건과 달리 안전사고는 시스템 전체가 원인이기 때문에 수사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핵심 원인을 밝혀낼 것"이라 말한 것은 환영할 만하다. 

   

안전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것, 기관사가 CCTV를 보지 못한 것, 작업자가 보고를 안 한 것 등은 사고 발생의 '과정'이지 '원인'은 아니다.

 

위와 같은 일들이 발생하도록 하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이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서울메트로가 스크린도어 유지 보수 비용을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해놓고 하청 업체에 이를 맡긴 것이 원인인 것이다. 

 

시스템이 문제라면 시스템 자체인 (원청)회사가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로에 지친 청년이 죽고 마는 원통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고 만다. 

  

 

그 쇳물 쓰지 마라/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중략)

 

지난 2010년 9월, 충남 당진에 위치한 제철소에서 29살 청년이 용광로에 떨어져 시신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그때 한 누리꾼이 남긴 댓글시 '그 쇳물 쓰지 마라'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크게 이슈가 된 바 있다.  하지만 몇 년 뒤 현대제철에서 또다시 노동자가 용광로에 떨어져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피로에 지친 노동자들은 언제든 끔찍한 사고를 당할 위험에 처해있으며 오늘도 서울시 1~4호선 스크린 도어는 고장날 것이고, 어디선가는 이를 고치는 하청업체 직원들이 현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전동차 사이에 끼고, 용광로에 떨어져 죽고, 지게차에 깔려 숨지는 이같은 일들이 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일이 멈춰질 수 있을까. 

 

경찰과 검찰이 사명감을 갖고 불합리한 '시스템'의 악순환을 끊어주길 바란다.

 

정은혜 기자 eunhy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