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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아영이가 성폭행 심리 치료 중 그린 그림 '꽃의 눈물'

성폭행 피해 어린이인 아영이(가명·12·여)가 인천해바라기센터를 찾은 것은 작년 5월의 일이다.

인사이트

gettyimagesbank


성폭행 피해 어린이인 아영이(가명·12·여)가 인천해바라기센터를 찾은 것은 작년 5월의 일이다.


상담실에서도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아영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아영이는 상담사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는 괜찮아요…전 상담받을 필요가 없어요."


성폭력 피해 아동 대부분은 보호자와 함께 상담센터를 방문해도 처음에는 아영이처럼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한 영역을 침범당한 악몽 때문에 의료진이나 상담사에게도 경계심을 풀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이럴 때 효과적인 치료법이 미술 심리치료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그림으로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고, 미술 심리치료사는 그림을 보고 아이의 심리상태를 파악해 치유를 돕는다.


해바라기센터도 아영이의 정신건강 회복을 위해 가천대 길병원 병원진료와 함께 미술 심리치료를 병행했다.


아영이가 상담 초기 그린 그림은 거칠고 메말랐다.


인사이트(좌) 꽃의 눈물 (그림 1), (우) 아무도 모르는아픔(그림 2)


아영이는 첫 번째 그림(그림1)을 그리고 나서 '꽃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눈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림 속의 비는 꽃의 성장을 돕는 비가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슬픔을 나타내는 비였다.


미술치료가 시작된 지 2∼3개월 지났지만 아영이의 마음속 상처는 여전히 깊었다.


'아무도 모르는 아픔'(그림2)이란 제목의 그림에서는 나무 주변에 가시가 잔뜩 있다.


아영이는 자기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가시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끔찍한 사건을 겪은 것도 힘든데 피해자에게도 일말의 잘못이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영이 어머니가 미술치료를 포기하겠다고 한 것은 이때쯤이다.


어머니는 아영이가 센터를 방문할 때마다 괴로운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것 같아 너무나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상처를 덮어만 두는 것은 오히려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소견에 따라 아영이는 미술치료를 계속 받기로 했다.


미술치료를 시작한 지 약 반년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서 아영이의 그림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강한 생기가 느껴졌다.


인사이트'휴식처'(사진3), 오른쪽이 '금꽃길'(사진4)


아영이는 연초에 그림 '휴식처'(그림3)를 그리고 나서 "나무는 엄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단단한 나무이고 튼튼한 나무다. 내가 엄마의 휴식처가 될 수 있고 엄마가 내 휴식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술 치료사 배지수씨는 "나무에 가지가 없는 점 등 앞으로 더 해결할 과제들이 남긴 했지만 하트라는 새로운 상징이 등장하고 전보다 표현이 건강해진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까지 약 1년 4개월간 센터에서 총 44차례의 상담을 받은 아영이는 약 30점의 그림을 그리며 밝고 명랑한 얼굴을 되찾고 미술 치료 일정을 마쳤다.


아영이의 마지막 그림에 붙인 이름은 '금꽃길'(그림4)이다.


사랑을 뜻하는 하트 양옆에 꽃길을 그리고 그 옆을 금가루로 장식했다.


앞으로 가족과 함께 '꽃길'만 걷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아이들의 그림은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자기감정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2년간 집에서 감금된 채 학대받다가 작년 11월 맨발로 탈출한 '몸무게 16kg 11살 소녀'는 병원에서 그린 그림에서 A4 용지의 넓은 공간을 놔두고 이층집을 2∼3cm 크기로 조그맣게 그렸다.


인사이트학대 피해 탈출한 '맨발 소녀'가 그린 그림 /신의진 전 국회의원 제공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신의진 전 국회의원은 당시 "그림을 이렇게 작게 그린 것은 오랜 기간 학대를 당해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는 피해 아동의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영이처럼 성폭행 피해를 봤거나 강제추행 피해를 보고 인천해바라기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어린이·청소년이 2009년 센터 개관 이후 7년 만에 1천명을 넘어 1일 현재 1천49명에 이르고 있다.


인천해바라기센터 소장인 배승민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성폭력 피해 아동의 빠른 치유를 도우려면 가족이 의료진·전문상담사와 충분한 상담을 하고 신속하게 후속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센터가 피해 아동에게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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