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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년 전 오늘(28일),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1년 전 오늘(1920년 9월 28일), 대한의 역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독립운동가가 숨졌다.

인사이트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인사이트] 전준강 기자 = 101년 전 오늘(1920년 9월 28일), 대한의 역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독립운동가가 숨졌다.


일본 간수들의 모진 고문에 세상을 떠난 그의 나이는 고작 18살이었다.


그렇다. 101년 전 오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열사는 바로 유관순 열사였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심지가 굳었다.


모두가 "배불리 살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 때 유관순 열사는 "한국의 잔다르크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고 한다.


인사이트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어린 나이 때부터 조국을 위해 하고자 했던 게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학생들과 손을 잡고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에 나섰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독립운동을 감행한 것이다.


3·1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학교에 임시 휴교령이 퍼지자 그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만세 운동 필요성을 역설했다.


1919년 4월 2일(음력 3월 1일), 유관순 열사는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아우내 장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유관순 열사는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인사이트유관순 열사 / 온라인 커뮤니티


결국 만세 운동을 주도한 그는 일제 헌병의 칼에 맞아 체포됐다. 이후 상상할 수도 없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손톱과 발톱이 뽑히고 심지어 '성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서대문 형무소에 같힌 독립투사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끔찍한 고문 속에서도 나라를 향한 사랑과 절개를 거두지 않은 그였지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1920년 9월 28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늘 하루, 유관순 열사를 한 번쯤 떠올리며 감사 인사를 해보는 건 어떨까. 그와 같은 이가 희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