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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은 돈만 밝히는 기생보다 똑똑한 '의녀'를 더 좋아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돈을 밝히는 기생보다 몸을 팔지도 않으면서 은밀히 정을 통할 수 있는 존재인 의녀를 더 선호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마의'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사극 '허준'과 '대장금'을 통해 조선 시대 의녀라는 직업을 알고 있는 사람은 꽤 많다.


드라마에서 의녀는 지식이 풍부한 여의사로 그려진다. 실제 의녀가 했던 일 또한 꽤나 전문적이었고 실력이 뛰어난 이들은 임금을 보살피는 어의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대체로 비참했다. 신분으로는 노비였으며 대부분은 가정생활조차 제대로 꾸리지 못할 만큼 불행한 삶을 살았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 이들은 다른 궁녀들과 달리 결혼이 가능했는데 가장 최선의 방법은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고 자식들을 양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미인도'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구암 허준'


양반들도 의녀를 첩으로 들이는 걸 선호했던 듯하다. 양반들에게 의녀는 기녀처럼 돈 때문에 몸을 팔지도 않으면서 은밀히 정을 통할 수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건강을 잘 돌보고 한문을 읽을 만큼 지식도 풍부했다. 


이런 까닭에 몇몇 의녀는 왕족과 정을 통하기도 했다.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과 사랑을 나눈 백이라는 의녀가 대표적이다. 


평원대군은 1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백이는 세종대왕의 사돈이었던 이사평의 첩으로 들어갔고 이 일로 백이는 세종대왕의 분노를 샀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간신'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자 의녀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는데 연산군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악화했다. 연산군이 의녀들을 동원에 술을 따르게 하고 음악 연주를 시키면서 기생처럼 부린 것이다. 


이후 의녀를 여악으로 데려다가 쓰는 일이 잦아지면서 조선 사람들은 의녀를 가리켜 '약방 기생'이라고 낮잡아 부르기도 했다. 


중종 때에 이르러 의녀들이 술자리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음에도 이러한 행위는 지속됐다. 


특히 선조 때 애종이라는 의녀는 뛰어난 의술로 이름을 날렸는데 가무는 물론 외모까지 뛰어나 많은 연회에 참석했고 당시 약방 기생 일인자로 손꼽혔다.


인사이트신윤복 그림 '청금상련'에 나타난 약방 기생의 모습


이에 선조는 "애종은 창녀라고 하니, 비록 의술이 있더라도 궐내에 들이지 말라"고 했던 것으로 저해진다.  


의녀들은 노비 출신이란 전통적인 관습에 얽매여 남성 의관들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끝내 얻지 못하고 조선 후기까지 미천한 대우를 받았다.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서양의학이 소개되면서 현대식 간호사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했으나 과거 의녀가 가졌던 이미 때문에 초기 간호사를 기피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