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유증' 너무 힘들어 '사랑했던 기억' 모두 지우고 싶었던 대학생의 대숲 글
페이스북 페이지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 공개된 이별 후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글이 누리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했다.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던가. 이별한 이에게는 천장의 형광등 불빛과 TV 속 노랫말도 아픈 러브스토리의 연출이 된다.
이별 후의 마음이 상처 나고 벗겨진 탓에 그 어떤 것이 닿더라도 고통은 이루 말하기 힘들다.
고려대학교에 재학 중인 A씨도 이별 후 찾아온 이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 새삼스러운 울음 갓난애마냥 몸이 아파서 잠을 설친 탓일 거다. 네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혼자 아픈 게 서럽고 옆에 누워 있었으면 해서 운 거다"라고 애써 눈물의 이유를 돌렸다.
지난 6일 페이스북 페이지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 공개된 A씨의 글이 화제다. "그러니까, 나는 널 사랑한 적이 없다"로 시작한 이 글은 수많은 누리꾼의 눈시울을 적셨다.
'사랑한 적이 없다'는 첫 문장에 의아스러움을 안고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A씨가 말하는 사랑의 참된 의미가 전해진다.
그는 "예를 들면 네가 눈썹을 추켜올리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는 표정 같은 게 좋았을 뿐이다. 내가 샌드위치 먹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미소 같은 게 괜찮았을 뿐이다"고 했다.
사랑한 적 없다는 그의 글에는 전 연인과 함께했던 수많은 나날이 좋았을 뿐이고 괜찮았을 뿐인 일들로 정성스레 나열됐다.
A씨가 말한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사랑'은 결국 사랑이었으나 이별 후 찾아온 고통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믿어야 할 지경에 이르게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과 홀로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분에 A씨는 눈물을 흘렸다. 이 고통을 가시게 해줄 유일한 치료제는 이미 떠나버린 옛 연인, 그래서 그에게 적절한 치료제는 없다.
A씨는 또다시 애써 외면해본다. "너는 더이상 내 치료제 역할을 못 한다. 이제 별다른 효험이 없을 거다"라고.
하지만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은 쉽게 잊힐리 없다. 둘만이 아는 추억이 밤마다 A씨 방을 찾아오고, 그때마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외어보지만 금세 까먹는다.
쿨한 척, 아무 일도 아닌 척, 하얗고 후련한 마음으로 옛 연인을 털어보려 하지만 A씨의 그 하얀 마음을 물들이는 건 역시 옛 기억이다.
동해로 떠났을 때 두 사람을 비추던 먼바다의 쪽빛, 봄날 애기능의 붉은빛, 전 연인이 입던 셔츠의 모과 빛, 그리고 믿기 힘들 정도로 사랑했던 나날들의 햇빛이 섞인다.
그리고 그 끝을 채운 건 눈물 자국이었다.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A씨의 글은 11일 현재 좋아요 4.6천, 댓글 1.3천, 공유 1.3천을 기록하고 있다.
아래는 A씨 글의 전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널 사랑한 적이 없다.
예를 들면 네가 눈썹을 추켜올리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는 표정 같은 게 좋았을 뿐이다. 네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잘 때 네 팔뚝을 내 두 팔로 끌어안으면 느껴지는 단단함과 포근함 그사이 어딘가의 느낌 따위나 좋아했다. 메뉴를 고를 때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식부터 외치는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좋았던 것뿐이다. 내가 다른 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똑같은 패턴으로 해대는, 질투 아닌 질투가 묻은 대사 같은 거나 좋아했다. 내 맨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온도나 내가 샌드위치 먹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미소 같은 게 괜찮았을 뿐이다. 안아 주기를 바랄 때마다 취하는 자세 같은 게 귀엽기는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나눠주지 않는 사소한 일상과 고민을 내게만 전해주는 네가 나쁘지 않았을 뿐이다. 그냥 이런 평범한 것들 따위가 좋았던 거지 널 사랑하진 않았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비밀스러운 시간들마저 사랑이 아니었다고 믿어야 할 지경까지 왔다. 결국 우리 사이에 '이 지경'이라는 말 하나 정도만 남겨졌구나. 자기도 모르는 새 내 손을 스르르 놓은 네가 짜증 나서, 그 덕에 또다시 홀로 둥둥 떠 있게 된 내가 불쌍해서 어젯밤엔 모처럼 울었다.
사실 이 새삼스러운 울음은 갓난애마냥 몸이 아파서 잠을 설친 탓일 거다. 네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혼자 아픈 게 서럽고 옆에 누가 있었으면 해서 운 거다. 말하자면 신체의 통증을 낫게 할 정신적 치료제를 찾는 본능, 그리고 결국 못 찾아서 부리는 생떼. 분명한 건 너는 더이상 내 치료제 역할을 못 한다. 이젠 별다른 효험이 없을 거다. 내가 찾고 있는 건 네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어 줄 사람일 거다. 그러니까, 나는 널 사랑한 적도 없고 네가 그립지도 않다. 난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제멋대로 옅어지고 있다. 단호하게 까맣던 내 마음의 명도가 낮아지고 있다. 회색빛으로, 흰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는 부탁한 적이 없는데 시간이 날 대신해서 자꾸만 너를 용서한다. 날 시험하려는지, 우리만 아는 추억이 밤마다 내 방으로 걸어 들어온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꾸역꾸역 외우고 있는데 멍청한 나는 계속 까먹는다.
이렇게 된 이상 단호하고 까만 마음은 포기다. 그저 하얗고 후련한 마음으로 널 털어버려야지. 옅어질 대로 옅어진 창백한 마음으로 너도 지워버릴 거다. 그런데 하얘져 가는 내 마음에, 스멀스멀 그날 밤 동해바다의 쪽빛이 섞인다. 봄날 애기능의 붉은 빛이 섞인다. 네가 입던 셔츠의 모과 빛이 섞인다. 믿기 힘들 정도로 사랑했던, 그리고 계속 그럴 자신이 있었던 날들의 햇빛이 섞인다.
쿨한 척 하얘지려던 마음이 이런저런 색깔들로 지저분하게 물든다. 화려한 기억들이 무채색 이별을 계속 방해한다. 마무리 얼룩은 언제나 눈물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