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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년 전 오늘(14일), 겁 없이 행주산성으로 달려오던 왜군들은 '짱돌'에 맞고 도망쳤다"

426년 전 오늘은 권율 장군과 조선의 백성이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맞이해 행주산성에서 격퇴한 행주대첩이 일어난 날이다.

인사이트행주대첩 기념관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조선 선조 26년 3월 14일(음력 2월 12일) 새벽 6시 약 3만 명의 왜군이 행주산성으로 진격해왔다. 


이에 맞서는 조선군 병력은 약 2,800여 명었다. 


우키다 히데이에, 이시다 미츠나리, 갓카와 히로이에 등 전국시대를 거치며 전장에서 뼈가 굵은 장수들이 이끌고 있던 일본군은 기세 등등하게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조선군에게는 여러모로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권율 장군은 백성과 군사들을 다독이고 승리를 다짐했다. 


인사이트KBS 1TV '임진왜란 1592'


그 결과, 조선군은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12시간에 걸쳐 9차례 격퇴하면서 승리를 쟁취했다. 


이것이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김시민의 진주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 대첩'이다. 


수적인 열세에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군인과 백성의 하나 된 마음 때문이었다. 


인사이트KBS 1TV '징비록'


당시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행주산성이 한양과 가까워 조선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뒀어야 했고,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까지 진격하기 위해서는 행주산성의 적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조선군에게 행주산성은 빼앗긴 한양을 되찾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그래서 권율 장군은 배수진을 쳤고, 행주산성을 최후의 격전지로 여기며 전투에 임했다. 


조선군은 아침 일찍부터 공격해 온 일본군을 상대로 화살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시간이 지나고 화살이 동나자 부녀자들도 전투에 나섰다. 


부녀자들은 덧치마에 돌을 담아 운반했고, 왜군에게 돌멩이를 던지며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인사이트YouTube 'NATV 국회방송'


새롭게 개발된 조선군의 무기도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아침 일찍부터 수적 우세를 밀고 공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을 향해 화차와 신기전 등 신무기를 사용했다. 신기전은 조선판 로켓추진 화살이고, 이 신기전을 이용한 다연발 로켓이 '화차'다. 


당시로써는 시대를 앞섰던 이 병기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백성들의 마음이 더해져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했다. 


일본군의 사망자는 1만 5천 명, 부상자는 9천 명이었다. 조선군 사상자는 130명에 불과했다. 


426년 전인 1593년 3월 14일 오늘, 그 치열했던 행주대첩은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성공적인 수성전으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