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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장사 하는 주제에"…재수사 요청하는 딸 잃은 아빠에게 경찰이 한 말

1998년 발생했으나 당시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이 종결됐던 대구 여대생 살인사건은 경찰의 부실한 초동수사가 문제였다.

인사이트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채소장사 하는 주제에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부검 감정서는 볼 줄이나 아냐?" 사망한 딸의 사건 수사를 요청한 아버지에게 경찰들이 남긴 말이다.


지난 3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지난 1998년 대구에서 발생한 여대생 정은희 씨의 사망 사건과 남겨진 의혹을 파헤쳐 보도했다.


1998년 10월, 당시 계명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은희 씨가 대구 구마고속도로 상에서 23톤 덤프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트럭 운전기사는 "차 앞에 뭔가 갑작스레 튀어나왔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피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차에 치여 숨진 은희 씨는 겉옷만 입은 채였다. 당연히 입고 있었어야 할 속옷을 입지 않았다. 


인사이트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은희 씨의 친구들이 이후 고속도로 옆 풀숲에서 은희 씨 것으로 보이는 속옷을 찾아냈다. 은희 씨의 쌍둥이 여동생이 "언니 것이 맞다"고 확인도 했다.


정황상 성폭행을 당한 은희 씨가 가해자에게서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아니면 성폭행 후 고의적으로 살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경찰은 유가족이 건넨 속옷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날 동기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은희 씨가 고속도로 무단횡단을 하다 치여 숨진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 짓고 사건을 종결 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담당 경찰은 취재진에 "팬티가 젊은 아가씨들이 입는 팬티가 아니라 아줌마들이 입는 팬티였다"며 발견된 속옷이 숨진 은희 씨의 것이라는 증거가 없었다고 했다.


인사이트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가족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찢어놓은 건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은희 씨의 아버지 정현조 씨는 아내와 대구에서 채소 가게를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조사를 요청하는 아버지에 경찰은 "채소장사 하는 주제에 네가 뭘 아느냐"고 했다. 


아버지는 부검감정서라도 달라고 했다. 경찰은 이번에는 "네가 부검감정서를 볼 줄이나 아느냐"고 했다.


"볼 줄도 모르는 게, 우리가 교통사고라고 하면 교통사고인 줄 알지, 어디 진정서를 올린다고 다 해주는 줄 아냐. 하고 싶으면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걸 직접 증명해와라. 그럼 우리가 수사해 줄게" 


아버지가 기억하는 당시 경찰의 발언이다.


인사이트SBS '그것이 알고 싶다'


온갖 수모에도 은희 씨의 가족들은 끈질기게 재조사를 요구했다. 5개월여가 지나서야 국과수가 속옷 유전자를 분석했고 다시 1년 3개월이 흐른 뒤, 속옷은 은희 씨 것으로 최종 확인됐으며 남성의 정액도 발견됐다. 


유족들이 헌법소원까지 내서야 받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경찰은 그제야 초기 수사의 실패를 인정했다. 이미 초동수사의 골든타임은 놓쳐버린 뒤였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야 은희 씨의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과 DNA가 일치하는 범인이 잡힌다. 그러나 1998년 발생한 사건을 2013년 검찰로서는 공소시효 문제로 처벌할 방도가 없었다. 


스리랑카인 피의자는 결국 지난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으며 우리나라 법의 처벌을 완전히 피하게 됐다.


인사이트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 출연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DNA가 있는데 순전히 행정처분의 시효가 종료됐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을 놔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범인을 잡고서도 처벌을 할 수 없는 무력한 현실, 경찰의 부실한 수사. 사건 발생 후 20년이 지났다. 


여전히 피맺힌 가슴을 부여잡고 살아가고 있는 은희 씨 아버지는 이제는 당신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


"대학시험 쳐서 서울로 가려고 하는 걸 집을 떠나면 너도 고생이고 우리도 돈 많이 들고 이러니까 대구에서 하라고 했는데, 그러던 중에 사고 나니까 내가 미안한 거야. 나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