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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에 폭탄 던진 이봉창 선생은 원래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다"

많은 돈을 벌고, 더욱 방탕하게 살고 싶어 처절하게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이봉창 의사는 조선을 향한 일본의 멸시에 독립운동을 하게 됐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86년 전인 1932년 오늘(10일)은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서거일이다.


1901년 조선 경성(오늘날 서울)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성인이 되자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젊은 시절 그는 용산역에서 열차 관리 일을 했다. 벌어드린 돈은 좋은 양복을 사 입고, 여자를 만나는 데 탕진했다.


그러나 일본인과의 차별 대우는 항상 불만이었다. '조선인'이란 이유로 승진이 누락됐고 월급과 상여금도 적게 타야 했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이 놀기 위해서는 조선인 딱지를 떼고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인사이트(좌)태극기 앞에 폭탄을 들고 선 이봉창 의사, (우)이봉창 의사 선언문 / 독립기념관


결국,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의 양자가 됐다.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도 얻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계속 '조선인'이란 딱지가 붙어 다녔다. 일본에 가서 일본 이름을 썼지만 차별 대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이봉창 의사가 결국 일본을 증오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그는 진정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일왕 즉위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행사장을 찾은 이봉창 의사는 '한글'로 된 편지 한 통을 들키게 된다. 


인사이트왼쪽부터 이봉창 의사,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 / 독립기념관


이 편지는 조선에 있는 어머니에게 돈을 좀 보내 달라고 요청한 편지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봉창 의사가 한글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가둬 버렸다. 


항상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일본과 조선은 하나에서 나왔다고 선전한 일본. 그러나 이봉창 의사는 일본 한가운데에서 처절하게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들의 멸시를 겪었다. 


이 일로 그는 일본을 증오하게 됐다. 일본인 '기노시타 쇼조'가 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인'으로 남기로 한 것.


이후 이봉창 의사는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향했다. 오랜 시간 방탕한 시절을 보낸 그에게 더 이상 두려움은 없는 듯 보였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인사이트한국민족문화대백과


상해에서 김구를 만난 이봉창 의사는 김구의 뜻에 따라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한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그는 일본 도쿄 근교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 의사가 던진 수류탄은 결국 빗나가 의거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재판장에서, 또 사형장에서도 조선인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범인(이봉창)의 태도는 태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띠고, 이런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관념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렇게 한 때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이봉창 의사는 삶의 마지막에서 자랑스러운 '조선인'으로 남았다. 


인사이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