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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제과도 대놓고 '버터와플' 베끼게 만든 크라운해태 '과자장인' 윤영달 회장

어릴 적 추억을 자극하는 과자 '버터와플'과 '죠리퐁'은 모두 윤영달 크라운해태홀딩스 회장이 손수 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사이트사진 제공 = 크라운해태


윤영달 크라운해태홀딩스 회장, 버터와플·죠리퐁 손수 개발


[인사이트] 황성아 기자 = '버터와플', '죠리퐁'은 어릴 적 추억을 자극하는 과자 이름이다.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자랑하는 '버터와플'과 강냉이처럼 생겼지만 강냉이보다 달콤 고소해 맛있는 '죠리퐁'은 모두 윤영달 크라운해태홀딩스 회장이 손수 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영달 회장은 지난 1960년대 한국 과자의 판도를 바꾼 장본인이다. 그는 유학 시절 미국인들이 먹던 시리얼과 한국인의 과자 '뻥튀기'에서 영감을 얻어 '죠리퐁'을 만들었다.


제품을 개발할 당시 그는 옥수수부터 보리, 팥 그리고 율무 등 다양한 곡물로 실험을 했다.


숱한 실패한 경험 속에서 우연히 '밀쌀'이 건강에 좋고 잘 튀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그는 밀쌀을 튀겨 고온의 설탕물을 골고루 묻히는 기계를 개발한 후 '죠리퐁'을 완성시켰다.


인사이트크라운해태 '죠리퐁' / 온라인 커뮤니티


'밀쌀' 잘 튀겨 설탕물 묻혀 개발한 '죠리퐁'  


그 덕에 지난 1972년 크라운제과는 윤영달 회장이 개발한 '죠리퐁'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지난 1998년 말 IMF 당시 회사는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윤영달 회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경영권 포기 각서를 쓰고 법정 화의를 신청했다.


그는 자산을 정리하고 230여개에 달하던 품목 중 70개를 선발해 경영 효율화도 실천했다.


임직원들도 회사를 살리는데 일조했다. 생산직 근로자를 포함한 직원들은 공장매각, 명예퇴직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윤영달 회장 역시 지난 1998년 초 화의 이후 1년 동안은 사무실에서 숙식하며 경영 일선에 나서며 경영 개선을 위한 노력을 몸소 실천했다.


인사이트크라운 해태 본사 / 사진 제공 = 크라운 해태


윤영달 회장 "본업에만 충실하자" 경영 철학 내세워 


특히 그는 '본업에만 충실하자'는 경영 철학을 내세우며 제품 개발도 꾸준히 해나갔다. 


지난 1998년 윤 회장은 네덜란드산 낡은 와플 기계를 국내로 들여와 개조한 후 '버터와플'을 만들었다. 노력의 산물일까. 크라운 버터와플은 출시하자마자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윤영달 회장은 자만하지 않았다. 품질 향상에도 힘썼다. 그는 마케팅뿐만 아니라 생산 영업 관리 홍보 등 전 부서의 유능한 인력을 뽑아 일종의 별동 조직 '뷰팀'을 만들었다.


그 결과 뷰팀은 할인점용 대용량 콘칩과 죠리퐁도 선보이며 과자 업계에서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윤영달 회장의 부단한 노력 덕에 크라운제과는 탄탄한 매출 구조를 이뤄냈다. 지난 2003년 윤영달 회장은 화의를 졸업하며 기사회생을 했다.


인사이트국악방송에 출연한 윤영달 회장 모습 / 국악방송


4년 만에 화의 졸업하고 기사회생하는데 성공한 윤영달 회장


당시 채권단은 영업사원과 함께 현장을 누비는 윤 회장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화의를 받아들였다고 알려졌다.


경영난을 극복한 지 얼마 안 돼 윤영달 회장은 회사의 외형 성장에 집중하기 위해 해태제과를 인수했다.


해태제과를 인수할 자금력이 부족하다는 업계 관계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윤영달 회장은 군인공제회, KTB네트웍스 등과 컨소시업을 만들어 약 6,500억원에 해태제과 지분을 전량 매입했다.


그 결과 크라운해태 제과는 오리온을 제치고 제과업계 1위인 롯데와 경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이제는 제과 업계 1위 롯데가 크라운해태 제과의 버터와플을 '미투' 상품으로 만들어 내놓을 정도다.


오늘날의 크라운해태 제과가 있을 수 있던 것은 단연 윤영달 회장의 남다른 끈기와 결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