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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살 노령에도 일제가 내린 작위 뒤로하고 '독립투사' 택한 조선의 신하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독립을 위해 힘쓴 조선의 신하가 있었다.

인사이트국립민속박물관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고위직을 역임했던 조선의 신하에게 일제는 남작 작위를 하사하며 호의호식을 약속한다.


하지만 환갑이 넘은 조선의 신하는 이를 뒤로하고 도리어 중국으로 향했다. 그에겐 끝까지 지켜야 할 조선이 있었다.


96년 전 오늘(4일)은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독립운동에 힘쓴 대한제국의 관료 김가진이 순국한 날이다.


외교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그는 고종의 신임을 받아 1886년 41세라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갑오개혁에도 일조했던 그는 농상공부대신, 법무대신, 중추원 의장 등 정부 고관을 두루 맡았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문역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인사이트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일본은 조선귀족령에 따라 김가진에게 남작 작위를 내린다.


김가진은 작위를 반납하진 않았으나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대동단을 창설해 초대 총재를 맡았으며, 1919년 11월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일제에 발각돼 작위를 박탈 당한다.


그 길로 김가진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고문으로 활약했다. 그때 김가진의 나이 일흔넷이었다.


문신이었지만 무장 투쟁에 앞장섰던 김가진은 중국에서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고, 1922년 7월 향년 77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덕혜옹주'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상하이에서 그의 장례가 열렸다. 안창호가 추도사를 했고, 수백명의 교민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김가진의 뜻을 이어받아 며느리 정정화는 남편 김의한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모금활동을 펼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후손들에게도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뿌리깊이 전파하고 떠난 김가진이었다. 김가진 가문에 알려진 독립운동가 후손만 3명이다.


조선에 남아 배불리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중국으로 향했던 김가진.


그러나 김가진은 일제가 강제로 내린 작위를 '스스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00년 가까이 흐른 2018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의 유해는 여전히 이역만리 차갑고 낯선 땅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