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 학살 99주기'…일본군이 저지른 조선인 학살 사건 6

인사이트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제공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1919년 3월 29일 함경남도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 시장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군중들의 열의는 당시 영선 시장을 뜨겁게 달궜는데, 안타깝게도 이 외침은 곧 비명으로 바뀌었다.


3·1 운동을 멈추기 위해 영산 시장을 습격한 일본군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발포했기 때문.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6명의 군중이 사망했고 이후 일본군은 시신을 운반하던 유족이 헌병 주재소 앞에서 독립이 이뤄지기 전까지 시신을 매장하지 않겠다고 항의하자 이들마저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인사이트서울시 제공


이처럼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군은 독립 운동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수도 없이 자행했다.


한반도 전역을 피로 물들게 한 이들의 학살극은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우리 선조들은 굴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


선조들의 독립을 위한 헌신과 노력을 이해하고 잊혀진 역사를 되새겨야 하는 지금, 일본군이 우리 선조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학살 사건을 모아봤다.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지만 이 비극의 역사를 꼭 알고 일본의 과오를 절대 잊지 않도록 해야 하겠다.


1. 수촌리 학살 사건


인사이트독립기념관


1919년 4월 5일, 3·1 운동의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수촌리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수촌리 가옥 42호 중 38호가 전소됐으며, 4월 11일 일본군이 다시 와서 나머지 가옥을 불태웠다.


인사이트독립기념관


마을 전체가 학살 당한 수촌리 학살 사건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으나 일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영국 공사관 커티스, 프리랜서 기자 테일러의 고발로 세상에 알려졌다.


2. 제암리 학살 사건


인사이트국가보훈처


3·1 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아리다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한 무리의 일본 군경은 제암리에 와서 기독교도·천도교도 30명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이때 한 여성이 어린 아기를 창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일본 군경은 아기마저 잔혹하게 찔러죽였다.


이후 일본군은 학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고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렇게 교회에서 죽은 사람 23명을 포함해 무고한 양민 29명이 학살당했고, 이 비극은 세브란스 병원 의사 스코필드 박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3. 신한촌 사


인사이트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신한촌 사건은 1920년 4월 연해주 신한촌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흔히 신한촌 참변 또는 4월 참변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재형·김이직·엄주필·황경섭 등 한인 지도자가 사살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50여명, 니콜리스크에서 70여명이 체포됐다.


4.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인사이트


인사이트온라인 커뮤니티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군과 경찰은 흉흉해진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는다"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이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은 일본인들은 매우 흥분했고 이후 자경단을 조직, 군경과 함께 조선인 수천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요시노 사쿠조는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6,066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수만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5. 간도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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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참변은 1920년 일제가 봉오동(1920년 6월),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에서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만주를 침략해 무고한 한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만 약 3,600여명이 학살당했고, 또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한인 사회 및 항일 단체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일제의 보복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계속됐다.


6. 위안부 학살 사건


YouTube '비디오머그'


서울시는 2월 27일 시청사에서 개최한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 콘퍼런스'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학살한 사실을 기록한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 영상은 3·1 운동 99주년을 기념해 최초로 공개된 것이며, 영상은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텅충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공격한 미·중 연합군이 텅충을 함락한 다음날인 9월 15일 촬영됐다.


영상에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후 한꺼번에 버려진 참혹한 모습이 담겨 있다.


인사이트서울시 제공


함락 당시 이곳엔 조선인 위안부 70∼80명이 있었고 연합군에 포로로 잡혀 생존한 23명을 제외한 위안부 대부분은 강제 집단 자결을 거부하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증언이나 기사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학살 현장을 담은 영상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지현 기자 john@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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