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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전 오늘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 피살된 날입니다"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럽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럽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위대한 독립운동가 '백야 김좌진 장군'이 1930년 1월 14일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흉탄에 맞고 순국하기 직전 한 말이다.


1889년 충청남도 홍성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김좌진 장군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민족의 자립과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조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호명학교(1907년)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여러 애국계몽운동을 조직 및 참여한 김좌진 장군은 안창호 등과 함께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했다.


이후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을 위해 자금을 모으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2년 6개월 동안 투옥됐던 김좌진 장군은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껴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김좌진 장군은 군사 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정의단을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했다.


인사이트청산리 전투 승리 기념 사진 / 국가보훈처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선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약 3,000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3만이 넘는 일본군을 상대한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은 4일간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1,200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세웠다. 이 전투의 이름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청산리 전투'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 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힌다.


일본군을 격파한 김좌진 좡군은 이후에도 독립 운동에 매진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만주 지역에 급속도로 전파되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1929년 7월)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은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김좌진 장군을 암살했다.


당시 김좌진 장군의 나이는 41살이었으며 그는 죽기 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좌진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