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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두환의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난 날"

37년 전 오늘, 1979년 12월 12일은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난 날이다.

인사이트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위키백과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37년 전 오늘, 1979년 12월 12일은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난 날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됐을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육군 소장이던 전두환은 사건 수사 방향과 군 인사 문제를 두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갈등을 빚었는데, 정승화 총장이 인사권을 휘둘러 자신을 무력화 시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먼저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전두환·노태우가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김내규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1979년 '12월 12일' 당시 대통령이던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강제 연행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협박에 굴복해 13일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승인했고 결국 정 총장은 김재규 내란 기도 방조 혐의로 기소, 80년 3월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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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두환을 비롯해 신군부세력은 군부 권력을 장악했고 1980년 5월 17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이 국가 권력을 탈취한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 전두환은 군사 반란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외친 광주 시민들을 무력으로 강경 진압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80년 6월 초헌법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했고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해 강제 하야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980년 9월 1일 전두환은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이후 전두환은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며 삼청교육대를 창설해 무고한 시민들의 인권을 유린했고,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했다.


국민에 대한 탄압과 억압이 계속되던 1987년 2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 사건'이 발생하면서 6월 항쟁이 촉발, 전두환은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한 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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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 반란의 진실은 1993년까지 비밀로 묻혔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2·12 군사 반란은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김영삼 대통령은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며 전두환과 노태우가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군사 반란의 주역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됐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벌금 2,205억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에 벌금 2,626억원 추징이 선고됐다.


하지만 이들은 수감 2년 만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 사면됐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만난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먼저 사면 의사를 밝혔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동의했기 때문.


덕분에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신들의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고, 진심어린 사과 한 번 없이 현재까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린 전두환의 '죄'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정의사회 구현'을 외쳤지만 실제론 우리나라의 정의를 짓밟고 더럽힌 '역사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사이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