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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장 사랑해준 여자의 생일이 곧 다가온다"…서울대 대숲에 올라온 글

지난 20일 페이스북 페이지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익명의 글 하나가 보는 이에게 먹먹함을 안기고 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tvN '디어 마이 프렌즈'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누군가의 사랑 고백이 보는 이들을 울리고 있다.


지난 20일 페이스북 페이지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는 "앞으로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하는 어느 서울대생의 글이 올라왔다.


익명의 글쓴이 A씨는 "지금까지 나를 가장 사랑해준 여자의 생일이 곧 다가온다"며 말문을 열었다.


여자가 A씨를 사랑해준 기간은 꽤 길었다. 사랑에는 주고받음이 있어야 하지만, A씨는 그저 받기만 했다.


여자는 A씨가 태어나기 전부터 A씨 가족의 가장이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들어온 여자는 다시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나갔다. 


인사이트Facebook 'SNUBamboo'


여자는 잠을 아끼면서 A씨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잠을 뺏겨가며 A씨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 A씨 가족은 그다지 화목하지 못했다. 실직한 아버지는 밥상에서 그릇을 던지며 행패를 부렸다. 여자는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저 A씨를 품에 안고 보호했다. 


여자는 분노를 몰라가며 A씨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를 참아가며 A씨를 사랑했다.


학생이 된 A씨는 학생회장을 했다. 학생회장을 하기 위해서는 씀씀이가 커야 했다. 학교 행사 때면 선생님들께 떡을 돌릴 줄 알아야 했고, 친구들에게 간식 한 번 사줄 수 있어야 했다. 


여자는 매해 겨울마다 똑같은, 많이 해진 파카를 입은 채 A씨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사진=고대현 기자 daehyun@


여자는 돈을 벌어가며 A씨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여자 자신에게 쓸 돈을 포기하며 A씨를 사랑했다.


여자는 뺏겨가며, 참아가며, 포기하며 A씨를 사랑해주었다. 그 마음을 뒤늦게 깨달은 A씨는 "더는 당신이 뺏기지도, 참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수 있도록 내가 열심히 살아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A씨는 고백했다.


"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


앞으로 내가 가장 사랑할 여자의 생일이 곧 다가온다. 


생일 축하해요, 엄마"


아래는 A씨가 남긴 글 전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가장 사랑해준 여자의 생일이 곧 다가온다. 생일 축하해, 당신


당신이 나를 사랑해준 기간은 꽤 길었다. 사랑은 주고받음이 있어야 한다. 그걸 모르고 그저 받기만 했던 그 시절들을 이야기 해볼까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기억들을, 당신의 생일을 맞이하였기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은 우리 집의 가장이었다. 나, 누나, 아빠, 할머니, 아빠의 동생까지. 이유는 모르지만 전부 당신의 경제력 하나에 의존했다. 그 정도로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서였을까.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능력이 뛰어나다는데, 모두가 당신 하나 바라볼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다는데, 왜 당신은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들어왔으면서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야했을까. 당신 품 안이 아니면 잠들지 않던, 하필이면 당신이 잠든 새벽마다 울었다던 나를 재워줬던 것 또한 당신 품이었다. 당신은 잠을 아끼면서 나를 사랑해줬다. 나중에야 알았다. 나이가 들어서 무심코 본 당신의 허벅지에 무수한 상처가 있었음을. 너무 꼬집고 할퀴어서 회복되지 않는 상처들은 분명 당신이 졸음을 이겨낸 흔적들이었다. 당신은 잠을 아끼면서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잠을 뺏겨가며 나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 아빠는 술에 빠져 살았다. 아빠는 실직을 했었다.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30대 가장의 패배감이 술로 변질되었다. 취기는 현실이 지워냈던 남자의 승부욕을 불러일으켰고, 그 승부욕은 당신에게 향했다. 일에 치여 들어온 당신은 술에 취해 들어온 아빠를 이길 수 없었다. 이길 의지가 있긴 했었을까. 낮에는 일에 치여 돈을 걱정했고, 밤에는 아빠에 치여 누나와 나를 걱정했던 당신이었다. 어느 날은, 내 유년 시절의 가장 충격적인 기억인데,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들어온 아빠가 당신에게 반찬 그릇을 던졌다. 다행히 반찬 그릇은 당신을 비껴갔고, 벽에 맞아 산산조각 났다. 당신은 울었고, 울면서도 그 와중에 나와 누나를 껴안아 보호했다. 그 때 내 어깨에 올린 당신의 팔이 많이 떨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그 떨림을 느끼며, 저 그릇이 우리 가족이었으며, 이제는 산산조각 나겠구나 생각했다. 그 사건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음날에 그릇 조각과 반찬 흔적들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여전히 당신은 내게 사랑스러운 입맞춤을 해주며 아침을 차려주었다. 아침 식사에 반찬이 한 가지 덜 올라왔다는 사실만 빼면, 그 사실 하나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아침이었다. 당신은 분노를 몰라서 나를 사랑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당신마저 분노했다면 우리 가족은 진작에 산산조각 났을 것임을. 누나와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당신이 참았던 것임을. 당신이 참고 또 참으며 분열된 우리 가족의 이음새를 억지로 붙잡고 있어주었음을. 당신은 분노를 몰라가며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를 참아가며 나를 사랑했다.

당신의 좋은 성격을 물려받은 덕분에 나는 학생회장을 했다. 학생회장은 참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학교 행사 때 선생님들께 떡도 돌릴 줄 알아야 했고, 교장실에 나무 화분 하나 정도 놓을 줄 알아야 했고, 친구들에게 간식 한 번 사줄 수 있어야 했다. 열심히 카드를 썼다. 그 당시는 아빠도 학원을 운영했고, 당신도 일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 집 사정이 괜찮은 줄 알았다. 당신도 부담 주지 않았기에 걱정 없이 카드를 썼다. 당신은 돈을 벌어가며 나를 사랑했다. 문득 매해 겨울마다 똑같은 파카를 입는 당신을 보며, 그리고 그 파카가 많이 해져있는 것을 보며 나중에야 알았다. 친구들에게 사준 간식으로 얻은 내 인기가, 선생님들께 돌린 떡으로 얻은 내 위신이, 당신이 백화점에서 집었다가 포기한 옷의 값어치였다는 것을. 당신은 돈을 벌어가며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에게 쓸 돈을 포기하며 나를 사랑했다.

뺏겨가며, 참아가며, 포기하며 나를 사랑해준 당신이다. 나중에서야, 지금에서야 그 사랑의 이유를 알아낸 내가 많이 밉다.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겠다. 내가 뺏겨가며, 참아가며, 포기하며 당신을 사랑하겠다. 그리고 더 이상 당신이 뺏기지도, 참지도, 포기하지도 않아도 되도록 내가 더 열심히 살겠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도 반드시 성공하겠다. 당신이 안정적으로 내게 기댈 수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당신을 걱정시켜가며 나를 혹사하지는 않겠다. 언제나 내 몸과 건강이 최우선인 당신이니까, 내 몸은 당신의 일부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아니까. 나를 사랑하겠다. 그것이 나에 대해 걱정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겠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겠다. 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


앞으로 내가 가장 사랑할 여자의 생일이 곧 다가온다. 생일 축하해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