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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서 동지 잃은 '독립투사'는 스스로 숨을 참아 목숨을 끊었다

97년 전 오늘(28일)은 무장투쟁으로 일제를 꺾고 조선의 광복을 꿈꿨던 독립투사 서일 선생이 서거한 날이다.

인사이트(좌) 서일 선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 SBS '야인시대'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조선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한 동지들이 죽음을 맞이하자, 자살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대신한 독립투사가 있다.


한평생 무장투쟁으로 일제를 무너뜨리려했던 대한의 독립운동가 서일이다.


살을 에이는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1881년 2월, 함경북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서일이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경성에서 사범대학을 나와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런 서일이 무장투쟁으로 돌아서게 된 건 1910년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치욕스러운 날을 겪고 나서다.


다부지고 강건했던 그의 눈매처럼, 서일은 오직 전쟁만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1911년 서일은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단체 '중광단'을 조직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그는 무관학교 출신인 김좌진, 이범석 장군을 영입해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점점 군의 세력을 키워간 그는 중광단을 개편해 병력 1천 5백명의 독립군단(북로군정서)을 이룬다.


그리고 1920년, 일본군 3천 3백명을 사살한 청산리 전투가 펼쳐진다. 그 중심엔 단연 서일이 이끄는 독립군이 있었다.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과 부사령관 김성, 참모장 나중소 등 이들은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무장투쟁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인사이트청산리대첩 기록화 / 독립기념관 


이후 서일 군단은 일제 5만 군사의 추격을 피해 만주를 떠나 소련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러 군단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이 만들어졌다. 서일이 총재로 추대됐다. 병력이 3500명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일제를 부수려 다시 한 번 힘을 모은 이들은 소련 자유시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항일무장투쟁 역사상 가장 최악의 참변이 일어난다.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의 계략으로 한국독립군이 러시아 적군에 집중 공격을 당한 것.


이 과정에서 독립군 960여명이 목숨을 잃고, 1800여명이 포로가 되거나 실종됐다.


수많은 동지들을 눈앞에서 잃어야 했던 서일은 모든 책임을 통감하고, 1921년 8월 28일 조용히 마을 뒷산에 오랐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 조국과 동포를 대할까.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다"


동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써 갚고자 했던 서일은 스스로 숨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신의 숨통을 끊었다.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