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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피뽑아 얼굴에 뿌린 '고문귀신' 하판락은 친일파 중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관료로,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관료로 살다 천수를 누린 '친일파' 하판락의 일생을 정리해봤다.

인사이트EBSCulture


[인사이트] 진민경 기자 = 73년 전 오늘은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던 조국 광복이 이룩된 날이다.


그 빛나는 날을 맞이하기 위해 역사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수천명의 독립운동가가 일제에 맞섰다.


그들은 가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내놨고,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걸었다.


같은 민족이면서 이와는 정반대의 삶, '친일'을 택한 이도 존재했다.


그중 독립운동가들을 잔인하게 고문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남성 하판락, 일본이름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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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관료로,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관료로 92세까지 살다 간 인물이다.


많은 독립운동가의 적이자, 민족의 역적이라 불린 하판락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하판락은 이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4년 2월 일본 경찰로 임용됐다.


이때 하판락이 맡은 임무는 일본에 저항하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는 것.


그런데 그 방식이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착혈고문'이 그랬다. 사람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은 뒤 피를 한가득 뽑아내고, 다시 그 사람의 몸에 뿌리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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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은 시도때도 없이 이 고문을 시행했고, 즐겼다. 그 악행이 얼마나 잔혹했으면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뜻의 '고문귀'가 그의 별명으로 지어졌다.


하판락은 1943년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선생 등 7~8명을 고문하던 당시 그들의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 고문, 전기 고문, 다리 고문 등도 이어졌다. 여경수, 이미경 선생 등 3인이 끝내 숨지고 말았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도 신체 불구자가 됐다.


그의 횡포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는 그를 더욱 높은 자리로 끌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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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직이뿌라.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이광우 선생이 아들에게 남긴 말이다. 그만큼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복 후 하판락은 제대로 된 심판을 받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하판락은 여전히 경찰로 근무하면서 부를 축적했고, 일제 강점기부터 축적된 재산으로 사업을 해 더 많은 돈을 모았다.


친일파 인물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그는 2003년, 92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 떠났다.


인사이트하판락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극빈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1945년 광복으로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이나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진짜 해방된 것은 '친일파' 였다"


친일 행적으로 같은 민족을 착취하고 고통속으로 몰아놓았던 인물, 하판락의 이름을 잊지 말고 똑똑히 기억하자.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을 떠올리며 고마운 마음 또한 되새기자.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국(愛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