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6일)은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범 총에 맞아 서거한 날입니다"

인사이트'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 칼 마이던스 / LIFE 1949년 7월호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한가로운 오후, 서울 한복판에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69년 전 오늘인 1949년 6월 26일은 '우리 민족의 큰 어른'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한 날이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스무 살이 된 1896년 2월 우연히 주막에서 일본군 쓰치다 죠스케를 마주친다.


쓰치다를 1895년 벌어진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범이라 생각한 김구 선생은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글을 남기며 쓰치다를 살해한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살인죄를 물어 김구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 선고를 받고 8월 26일 형 집행이 확정됐다. 


사형 직전, 고종이 특사로 집행 정지령을 내리면서 김구 선생은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출옥한 뒤 1908년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신민회가 발각되면서 김구 선생 역시 압송됐고,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이곳에서 선생은 자신의 호를 직접 짓는다. 흰 백(白)과 무릇 범(凡)을 딴 '백범(白凡)'.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땅에 와서 살다간 숱한 보통 사람처럼, 평범한 민초로 살다 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인사이트영화 '대장 김창수'


선생이 생각하는 민초는 애국심을 가진, 주권의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 탄압이 더욱 흉포해지자 김구 선생은 상해로 거처를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본격적인 항거에 나섰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일왕 저격과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를 지휘했고, 이를 통해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일깨웠다.


김구 선생은 오직 조선의 힘으로 일본에서 독립하기 위해 애썼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김구 선생은 스스로 나라를 되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꼈다.


인사이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친일파 숙청을 주장했으며,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한반도의 '민족 통일'을 염원했다.


그러던 1949년 6월 26일, 손님으로 가장한 암살범을 맞닥뜨린다. 


육군 장교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향해 네 차례 방아쇠를 당기고, 선생은 과다출혈로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깊은 슬픔이 나라 전체를 뒤덮었다. 해방 이후 거행된 우리나라 최초 국민장에는 100만여 시민이 몰려 마지막까지 김구 선생과 함께했다.


인사이트안두희 생전 모습 / KBS 1TV


암살범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석 달 만에 15년 형으로 감형되더니 2계급 특진을 하고 6.25 전쟁 때 포병 장교로 복귀한다.


제대 후에도 군납 공장 등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어들였다. 이에 안두희가 최고 배후 세력의 지시를 받아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짙어지기도 했다. 


늙어서도 호의호식하던 안두희는 1996년 10월 자택에서 한 시민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죗값을 받는 데까지 47년이었다. 


한편 세계적인 시사 잡지 라이프(LIFE)는 1949년 당시 김구 선생의 서거를 보도하며 "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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