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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윤봉길 의사를 총살한 후 쓰레기장에 버렸다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독립운동했던 윤봉길 의사는 죽어서도 일본군 손에 욕보여야 했다.

인사이트윤봉길기념사업회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거사 직전 윤봉길은 백범 김구의 2원짜리 시계와 자신이 차고 있던 6원짜리 시계를 바꾸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윤봉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했다.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모진 고문 끝에 총살로 생을 마감한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인사이트왼쪽이 윤봉길 시계, 오른쪽이 김구 시계 / 국가보훈처 


21일인 오늘은 윤봉길 의사 탄생 110주년이다. 목숨 바쳐 일제와 맞섰던 윤봉길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김구로부터 2개의 폭탄을 전달받았다.


하나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릴 일왕 생일 잔치에 던질 수통폭탄, 하나는 거사를 마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사용할 도시락 폭탄이었다.


앞서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경계를 삼엄하게 했던 일본군은 식장에 물통과 도시락만 허용했다. 폭탄이 이 같은 모양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인사이트체포 당시 윤봉길 모습 / 국가보훈처 


윤봉길은 일본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한 손에 일장기를 들었다. 오전 9시 30분 행사가 시작됐다. 공원 전체에 기미 가요가 울려 퍼지고 행사는 점점 고조됐다.


그때 윤봉길은 거침없이 달려 나와 수통형 폭탄을 일왕에게 던졌다. 이 폭탄으로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가 사망했다.


또한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크게 다쳤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도시락 폭탄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일제의 손에는 절대 죽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였다.


인사이트TV조선 영상실록


하지만 도시락 폭탄은 불발됐고,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된다. 일본 군화에 짓밟히고 무참히 구타 당해 윤봉길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올랐다.


그런데도 윤봉길은 절개를 잃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 시민운동가 야마구치 다카시가 쓴 저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원래 현장에서 윤봉길을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모습이 조선인들을 집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 하지 않았다. 윤봉길은 일본 이시카와 현 카나자와 형무소로 끌려왔고 같은 해 12월 19일 총살형이 집행됐다.


양 팔을 좌우로 벌린 채 나무에 묶인 윤봉길. 이마엔 하얀 천이 둘러졌다. 총알이 윤봉길의 미간을 관통하면서 윤봉길 피로 천이 붉게 물든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일제가 일장기 모양을 내기 위해 일부러 천을 씌웠다는 추측을 내놓았다.


인사이트윤봉길기념사업회 


일제는 윤봉길이 죽고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본군은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윤봉길 시신을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목에 매장한다.


설민석 강사는 이 지점이 쓰레기 하차장이라고 설명했다. 그 흔한 표지나 봉분 하나 없이 묻힌 윤봉길 유해.


이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윤봉길 시신을 밟으라는 일본군의 치졸하고 졸렬한 보복이었다.


윤봉길의 시신은 광복 후 박열이 수습해 고국으로 가져온다. 현재 윤봉길 시신은 '독립운동의 성지' 효창공원에 안장돼 있다.


인사이트TV조선 영상실록 


윤봉길은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기 전 전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맹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