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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전 오늘은 '조선총독부'에 폭탄 투척한 김익상 의사 서거일입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였던 김익상 의사를 소개한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밀정'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다"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단원 김익상은 1921년 9월 10일 위 말을 남기고 북경 의열단 거처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폭탄 두 개를 옷에 품은 채였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서는 물론 일본 경찰의 검문이 있었다. 김익상은 같이 탄 일본 여인에게 말을 걸어 일행인 시늉을 하고, 경찰은 두 사람을 부부로 여기고 지나친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김익상은 9월 12일 조선총독부를 찾아갔다.


당시 작가 박태원이 해방 후 김원봉의 증언을 토대로 쓴 글에 따르면 김익상은 이날 찻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병 마신 뒤 총독부로 들어갔다.


인사이트조선총독부 / 우리역사넷


삼엄히 앞을 지키고 있던 무장 헌병이 누구냐며 가로막자 김익상은 "전기를 고치러 왔다"고 전기 수리공을 가장해 통과한다.


그렇게 역사상 유일한, 일제가 경악한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이 시작된다.


2층에서 폭탄 두 개를 던진 뒤 김익상은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가며 올라오는 경찰 등에게 "위험하니까 올라가지 마라"는 말까지 남겼다고 전해진다.


총독부를 빠져나온 김익상은 곧바로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9월 17일 다시 북경에 도착함으로써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다던 자신의 말을 지켰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밀정'


일제의 심장을 겨누고 유유히 사라졌던 김익상이 붙잡힌 것은 다른 독립투쟁 사건 때문이었다.


6개월여 뒤인 1922년 3월, 김익상은 일본군의 타나카 키이치 육군대장을 암살하라는 의무를 맡는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실패하고 도주하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 직전 김익상이 보여준 행동은 김익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도주 중 김익상은 중국인 경찰이 자신을 붙잡으려 달려들자 경찰이 아닌 하늘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이에 관해 김익상은 이후 재판에서 "우리에게 아무 관계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을 하기 위하여 쏜 것"이라 설명한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밀정'


그런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일제는 경악했다.


당혹한 일제가 부랴부랴 그해 가을에 연 재판, 김익상은 재판장에서도 당당하게 독립 의지를 밝혔다.


당시 재판광경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김익상은 벙글벙글 웃는 낯으로 앉아 있었다.


사형 판결을 받고 상고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한국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바이니 이 일로 형벌을 당하게 되면 처음부터 달게 받은 셈 잡고 한 일이다. 어떤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하겠다"고 진술했을 뿐이다.


인사이트김익상 의사 / 온라인 커뮤니티


사형 판결 이후 김익상의 행적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누구도 김익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죽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하다못해 김익상의 시신조차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충일이기도 한 93년 전 오늘, 1925년 6월 6일 옥중에서 순국했다는 말도 있고, 같은 날 일본인 형사에게 살해됐다는 말도 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20여 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광복 직전 만기출소했다 다시 일본 경찰에 연행돼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다는 설도 제기된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러나 김익상은 그 가운데서도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유일한 투사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저 김익상 의사가 생전 광복을 맛보았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