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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3일)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이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신 날입니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 1944년 3월 13일, 그토록 꿈꾸던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채 순국했다.

인사이트(좌) 국가보훈처, (우) 국사편찬위원회


[인사이트] 김연진 기자 = "너는 영웅이다. 너보다도 너를 낳은 네 어머니가 더 영웅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검사의 말이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두고 '영웅'이라고 부를만한 인물. 그 누가 있으랴.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순국열사 김마리아(金瑪利亞) 선생이다. 일제가 3.1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한 핵심 인물이자 독립운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지난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난 김마리아 선생은 1906년 연동여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품게 됐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수학에 임하던 중 1919년 2.8 독립 선언이 일어났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마리아 선생은 지체 없이 적극 참가했고, 곧이어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비밀리에 귀국해 활동했다.


3.1운동 발발 직후 항일부녀단체 조직을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적발, 서대문감옥소(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약 5개월간 투옥생활 이후에도 김마리아 선생의 독립운동과 그 의지는 끝나지 않았다.


전국적인 규모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다.


그 과정에서 밀고자가 발생했다. 3.1운동에 참가하며 독립운동에 힘쓰던 오현주가 독립이 불투명해지자 친일파로 전향한 것이다.


인사이트국사편찬위원회


이에 애국부인회를 일본 경찰에 밀고했고, 결국 김마리아 선생은 다시 체포됐다.


투옥된 김마리아 선생은 끔찍한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선생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고, 이를 악물고 일제에 맞섰다.


건강이 쇠약해지자 병보석을 받아 입원 치료를 하던 김마리아 선생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가 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했다.


1933년에는 다시 조선으로 귀국해 윌슨(Wilson) 신학교 교사로 부임해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 1944년 3월 13일, 그토록 꿈꾸던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채 순국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암살'


그렇게 조국에는 봄이 찾아왔지만 꽃이 피지 않았다. 일제가 그 꽃을 앗아갔기 때문일 터.


도마 안중근 선생은 김마리아 선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 동지가 10명만 있었던들 한국은 독립이 됐을 것이다"


김연진 기자 ji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