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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당한 조선 청년들이 '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 청년들은 전범으로 몰려 사형당해야만 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군함도'


[인사이트] 심연주 기자 = "감시병으로 지원하는 사람에게는 매달 50엔씩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겠다"


지난 1942년, 조선총독부는 동남아에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할 감시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형식적으로는 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3,000명이 강제 동원돼 낯선 이국땅으로 끌려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태국 칸차나부리 콰이강 다리 공사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한국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공사장에 인부로 끌려온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을 위험한 공사 현장으로 끌고 가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일을 도맡아야만 했던 것이다.


인사이트온라인 커뮤니티


원하지 않았지만, 청년들은 가족들을 들먹이며 협박하는 일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마'가 됐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다.


청년들은 마침내 타국을 벗어나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범 재판이었다. 당시 한국인 포로 감시원은 B·C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이 중 23명이 사형됐으며 나머지는 1957년까지 일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 한 사람은 목을 매고, 또 다른 사람은 달리는 기차로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인사이트(좌) Twitter 'CJ Entertainment', (우) 연합뉴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일본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반강제적으로 포로 감시원이 되었고 그 때문에 심각한 희생과 피해를 본 것은 인정되지만, 실정법이 없으므로 전후 보상 청구를 기각한다"


지난 1999년 도쿄 최고 재판소는 이들의 보상 청구마저 기각해버렸다.


당시 전범으로 사형된 사람 중 한 명인 조문상은 유서를 남겼다.


"유령으로라도 지상을 떠돌 것이다. 그도 불가능하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라도 떠돌 것이다"라고.


징용으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억울한 청년들.


그의 마지막 유서는 억울함을 알아달라는 마지막 호소가 아니었을까.


심연주 기자 yeonju@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