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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파탈부터 폭군까지…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여왕 7

여성에게 인권이란 말 자체가 무색했던 과거에도 최고의 지위에 오른 여인들이 있다.

인사이트연합뉴스


[인사이트] 배다현 기자 = 오늘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최고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에 들어 영국의 대처 수상, 독일의 메르켈 총리 등 뛰어난 리더들이 등장했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수다.


그런데 여성에게 인권이란 말 자체가 무색했던 과거에도 최고의 지위에 오른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탁월한 지혜와 과감한 결단력으로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철저한 남성 중심의 정치 세계에서 남성의 부속품, 들러리를 거부하고 리더로 나섰던 역사 속 여왕들을 소개한다.


1. 클레오파트라


인사이트연합뉴스


프랑스 수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 말과 함께 미와 색으로 남자를 홀리는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고정돼 있다.


그러나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이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한평생을 고심하여 보낸 정치가이자 지략가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해 당대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천부적인 언어 능력으로 수많은 나라의 언어를 모두 구사했다.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하여 이집트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클레오파트라는 강성한 로마에 맞서 자신의 왕가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2. 측천무후


인사이트채널 칭 '여황제 무측천'


측천무후는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됐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고종 황제의 황후였지만 황태자들을 연이어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된 후 15년 간 중국을 다스렸다.


측천무후는 실권을 장악한 다음에도 공포 정치를 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정점에 오를 때까지 죽인 사람이 93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가문과 혈통 중심의 아니라 능력 위주의 관료 등용으로 당나라 전성기의 기반을 다졌다.


정치적으로는 공포 시대였지만 백성들의 생활은 대체로 안정을 누렸다.


그는 당시의 뛰어난 많은 문인들을 적극 우대해 화려하고 탐미적인 문화가 꽃필 수 있게 했고, 불교 숭상을 통해 중국 불교의 융성과 발전에 기여했다.


3. 이사벨 1세


인사이트gettyimagesKorea


이사벨 1세는 700여 년간 네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한 여인이다.


오빠 엔히크 4세의 서거 후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한 그는 아라곤 황태자 페르난도와 결혼해 나라를 공동 통치했다.


이후 남편이 아라곤 왕이 되자 에스파냐를 통일했으며 이듬해 이베리아 남부 이슬람교 국인 그라나다를 정복해 교황으로부터 가톨릭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사벨 1세는 근대적 중앙집권국가의 기초를 닦고 궁정학교를 설립했으며 많은 문헌을 편찬하는 등 문화진흥에 힘썼다.


또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원조하기도 했다.


4. 엘리자베스 1세


인사이트연합뉴스


엘리자베스는 여섯 살 때부터 군주로서의 자질을 개발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며 자신보다 책을 많이 독파한 학자는 거의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그는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고 승마와 사냥,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춤을 즐길 정도로 활동적인 성격이었다.


이 같은 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재위 45년간 잉글랜드를 극빈국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시켰다.


당시 잉글랜드 해군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해 경외의 대상이 됐고 종교적 화해도 이루었다.


5. 선덕여왕


인사이트연합뉴스


서기 632년 진평왕이 노환으로 숨을 거둔 후 첫째 딸 덕만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신라만이 가지고 있던 골품제라는 신분 덕분이었다. 당시 성골 중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가 그뿐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어질며 총명했다.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만 보고도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선덕여왕은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임금의 권위를 세우고 신라를 불법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재위 기간 동안 분황사를 비롯한 25개의 절을 세우고,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은 불탑과 불상을 많이 만들게 했다. 첨성대 역시 선덕 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6. 빅토리아


인사이트위키피디아


빅토리아 여왕은 대영제국,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인도의 여왕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은 전무후무한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먼저 해외에 눈에 돌렸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 영국 식민지를 두어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확보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국가답게 선구적으로 산업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쓸어 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도 두 개의 당으로 정리돼 정착됐다.


그는 64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안정적인 왕권을 수립하며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 왕실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7. 서태후


인사이트연합뉴스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9세기 남성 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에 황족인 공친왕과 연대하여 청나라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부국 자강운동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 


배다현 기자 dahyeo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