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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 일삼아 지금까지도 욕먹는 한국사 최악의 폭군 5

한국사 속에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다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폭군들이 있다.

인사이트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연합뉴스


[인사이트] 이별님 기자 = 임금이라면 모름지기 정사를 바르게 돌보고 백성들을 편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주색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보지 않거나, 무고한 백성들을 살육해 '폭군'이라고 낙인찍힌 군주들도 있다.


다행히 이들은 백성들과 신하들의 반발에 못 이겨 퇴위 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또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폭군'이라고 기록되는 등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은 물론 대대손손 손가락질받는 한국사 최악의 폭군에는 누가 있는지 아래의 목록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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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역적'


한국사 최악의 폭군을 꼽아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연산군을 지목할 것이다.


1494년 제10대 왕으로 즉위한 연산군은 초반에는 빈민구제정책과 국방 강화책 등을 시행하며 개혁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신하들 간의 정치적 대립이 날로 심해지면서 연산군은 점점 폭군의 본색을 드러냈다.


특히 생모인 폐비 윤씨가 부왕인 성종에 의해 사사됐다는 소식은 연산군을 더욱 충격에 빠트렸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일일이 색출해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들을 죽이거나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다.


덕분에 연산군의 왕권은 나날이 강화됐고, 연산군은 이를 바탕으로 국고를 낭비하며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그 밖에도 경연(經筵, 군주에게 유교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제도)를 없애 학문을 멀리했고, 사간원(司諫院, 언론을 담당 기관)을 폐지해 백성들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결국 연산군은 폭정을 참다못한 신하들에 의해 퇴위 됐고, 유배지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2. 충혜왕

인사이트

SBS '신의'


한국사 최악의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도 초반에는 개혁 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충혜왕은 즉위 초에는 물론 세자 시절서부터 폭군의 싹을 보였다.


원 간섭기에 태어난 충혜왕은 1330년 부왕 충숙왕의 명을 받고 귀국해 고려 제28대 왕으로 즉위했다.


포악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충혜왕은 즉위 후에도 주색에 빠지기 일쑤였고, 사냥 등 불필요한 일로 정사를 등한시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원나라가 부왕인 충숙왕을 복귀시켰고, 충혜왕은 충숙왕이 사망한 다음에야 다시 왕위를 되찾게 됐다.


왕위를 다시 물려받았음에도 충혜왕의 막장 행각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충혜왕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고 음탕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가 거느린 후궁만 1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또 미모가 뛰어난 여성이 있다면 그가 유부녀든 아니든 상관없이 겁탈하거나 억지로 궁궐에 데려왔다.


심지어 부왕 충숙왕의 계비 경화 공주와 외숙모까지 간음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결국 충혜왕은 원나라 왕실에 체포됐고, 유배지로 향하던 중 급사했다.


3. 의종

인사이트KBS1 '무인시대'


의종이 고려 제18대 왕으로 즉위할 당시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날이 갈수록 세력이 강해졌고, 내부에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일어났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이 같은 난국을 헤칠 수 있을 만한 재목이 못 됐다.


의종은 예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태생적으로 놀기를 너무 좋아했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보면 즉석에서 별궁이나 정자를 지었다. 심지어 백성들이 사는 민가까지 허물어 정자를 짓기도 했다.


의종이 재위 24년 동안 만든 별궁이나 정자 수는 무려 32개에 다다랐다.


특히 의종은 사치가 매우 심했다. 일부 신하들은 의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백성들의 집안 가보까지 빼앗았다.


향락과 사치에 빠진 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볼 리 만무했다. 말년에는 환관들 및 문신들과 어울려 술과 여색을 탐하기도 했다.


결국 의종은 무신들의 난으로 폐위됐고, 무신 이의민에게 척추가 꺾여 죽임을 당했다.


4. 모본왕

인사이트

채널A '천일야사'


고구려 제5대 왕 모본왕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기원후 48년에 재위한 만큼 그에 대한 기록은 많이 유실된 상태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모본왕은 한국사 속 최초의 폭군이라 할 수 있겠다.


모본왕 역시 앞서 설명했던 왕처럼 원래 성품이 포악했다.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모본왕은 즉위 초 홍수나 우박 등의 자연재해로 궁핍해진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본왕의 본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심지어 모본왕은 사람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고 한다. 또한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이 있으면 활을 당겨 쏘기도 했다.


결국 모본왕은 재위 6년 만에 신하인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다만 모본왕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만큼 그가 '만들어진 폭군'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모본왕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이 정변을 일으켰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본왕을 폭군으로 만들었다는 가설도 있다.


5. 봉상왕

인사이트채널A '천일야사'


고구려 제14대 왕 봉상왕 역시 선대왕 모본왕과 마찬가지로 폭정을 일삼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봉상왕은 자랄 때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은 성품을 지녔다.


불행하게도 봉상왕의 성품은 임금이 돼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즉위 원년에는 백성들에게 존경받는다는 이유로 같은 왕족인 달가를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봉상왕에게 업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당시 고구려는 연나라의 침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봉상왕이 이를 격퇴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봉상왕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등 대외 정치에는 능숙했으나 내외적으로는 매우 미숙했다.


대기근이 발생해 백성들이 굶주릴 때도 화려한 궁궐을 지어 백성들과 신하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일부 신하들은 봉상왕에게 백성을 살피라고 간언하기도 했는데, 그는 신하들의 충정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 사이에 기근은 더욱 심해졌고, 참다못한 신하들을 봉상왕을 폐위시키기에 이른다.


신하들의 격렬한 저항에 접한 봉상왕은 결국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한다.


'사이코패스' 의심될 정도로 살인·강간 일삼은 역사 속 왕자 4명왕의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강간해 '역사의 심판'을 받은 왕자들이 있다.


조선 마지막 황족 '미남 왕자' 이우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5가지'비운의 왕자'라 불리는 조선의 마지막 황족 이우 왕자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이별님 기자 byul@insig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