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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허균이 광해군에게 사지 잘리는 능지처참 당한 이유

지금으로부터 약 399년 전인 1618년 10월 12일,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사지가 찢겨 나갔다.

인사이트사진 제공 =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지금으로부터 약 399년 전인 1618년 10월 12일,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사지가 찢겨 나갔다.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였던 허균이 당시 역적으로 취급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허균은 지난 1569년 당대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였던 허씨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타고난 재능으로 26살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불과 41살의 나이에 형조참의(현재의 법무부 국장·실장급)에 올랐다.


인사이트허균 가족의 묘 / 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이처럼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이상하게도 서얼들과 어울리며 당시 계급 사회의 모순을 지적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가 쓴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서얼 출신이라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허균은 자신의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여 권력 기반을 탄탄히 하거나, 이이첨 등의 간신과 어울리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고.


인사이트허균의 편지 / 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허균이 계급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기 위해 불만을 가진 계층을 모아 혁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정치적 신념을 함께하던 이이첨은 이때부터 허균을 의심했고, 자신의 외손녀가 아들을 낳지 못해 허균의 딸이 후궁으로 들어오며 둘의 사이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지난 1618년 8월,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벌하러 하남 대장군이 온다"는 벽서가 붙었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 이 벽서를 붙인 사람이 허균의 심복임이 밝혀지며 허균은 역적이 돼 의금부로 압송됐다.


인사이트허균의 생가 / 네이버 백과사전


기록에 의하면 허균은 끝까지 역적 모의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8월 16일경 체포된 허균은 약 일주일 후인 24일 능지처참을 당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종 판결문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처럼 급하게 허균을 처형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그의 숙적이었던 기자헌은 후일 "판결문도 작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형을 받은 죄인은 없었다"면서 "훗날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사이트홍길동전 / 네이버 백과사전


이는 허균의 처형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정치적 이유에서 이뤄진 것임을 암시케 한다.


해당 사건을 기록한 '광해군일기' 역시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허균의 삼족은 멸해졌으며 집은 헐려서 연못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시대 최악의 형벌로 꼽히는 '능지처참'에 대한 6가지 진실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최악의 형벌 '능지처참'에 대해 정리해봤다.


황기현 기자 kihyu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