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日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입니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한창이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일본 히로시마 시 중심부에 투하됐다.
[인사이트] 김지현 기자 =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한창이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은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일본 히로시마 시 중심부에 투하했다.
9,750m 상공에서 투하된 '리틀 보이는 580m 상공에서 폭발했고, 이로 인해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6㎞ 이내의 모든 것들이 파괴됐다.
또한 당시 히로시마 시의 인구 약 34만명 중 약 14만명이 초기 폭발 및 방사능 피해 등으로 사망했다.
미국이 이런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원자폭탄을 히로시마 시에 투하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욕을 멈추고 한국, 대만과 같은 일본 식민지 국민들의 자유를 되찾아주는 것.
그러기 위해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사 기지와도 같은 히로시마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했고, 이에 미국은 8월 6일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해 일본의 항복을 유도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은 약 14만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음에도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 8월 9일 나가사키 시에 두 번째 원자폭탄인 '팻 맨'을 투하했다. 희생자는 약 8만명에 달했다.
'팻 맨' 투하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고, 제2차 세계대전도 끝이 났다.
한편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에게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다.
당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약 7만명이 피폭을 당한 것인데, 히로시마 시에서는 피해자 5만명 중 3만명이 넘게 사망했으며 나가사키 시에서는 2만명 중 1만명이 사망했다.
피폭 조선인들의 사망률이 일본인에 비해 훨씬 높았던 이유는 대다수의 조선인이 일본 병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등 방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피폭 조선인에 대한 실태 조사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이 '유일한 피폭국'이라고 선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