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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태어나 '엄마'로 살라고 강요하는 한국사회

남자들은 '아빠'가 되어도 '남자'로 사회에서 인정받지만 여자들은 왜 '엄마'가 되는 순간 '여자'와 '엄마'의 갈림길에 서는 걸까?

via EBS '빨강 머리 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푸른 들판 위 그린게이블즈에 살던 앤은 틈만 나면 친구들과 싸우는 천방지축이지만 알고 보면 속 깊고 정 많은 소녀였다. 혹시 다이애나와 들판에서 뛰놀던 앤의 뒷 이야기를 아는가?

 

앤은 늘 티격태격하던 길버트와 웨딩 마치를 올린 뒤 '엄마'가 된다. 하지만 우리의 앤은 분명 남달랐다. 

 

결혼 이후 앤은 세계 대전에 참전한 남편 길버트를 찾아 전쟁터에 뛰어드는가 하면, 남성의 영역이었던 소설 작가에 도전한다.

 

via EBS '빨강 머리 앤'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한 요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로썬 앤의 모습이 꽤나 파격적인 행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어떠할까? 

 

'여자라면 모름지기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한다'는 인식이 "너무 시대착오적인 얘기네"라며 웃어넘길 수 있을까?

 

최근 SBS 다큐스페셜 '엄마의 전쟁'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잘 꼬집어 냈다. '여자라면 모름지기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2016년 한국에서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집어낸 것이다.

 

이 3부작 다큐 중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1부였다. 제작진은 출연자 여성에게 질문한다. "본인은 여자예요? 엄마예요?" 이에 능력 있는 간호사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출연자는 "여자도, 엄마도 아닌 것 같다"는 답을 내뱉는다.

 

vis SBS 스페셜 '엄마의 전쟁'

 

남자들은 아빠가 되고 여자들은 엄마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아빠'가 되어도 '남자'로 사회에서 인정받지만 여자들은 왜 '엄마'가 되는 순간 '여자'와 '엄마'의 갈림길에 서는 걸까?

 

해당 다큐를 지켜본 여성 시청자들은 씁쓸함에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굳이 TV 속 여성 출연자들까지 거론하지 않아도 주변만 봐도 답답한 상황은 여전하다.

 

여기서 잠시 내가 아는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내 지인은 남편보다 경력과 연봉이 월등한 '여자'다. 둘다 벌어도 빠듯한 게 서울살이라니 서로에게 불만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여자'에게도 고민은 있다.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육아휴직 등을 챙겨 쓴다고 해도 그 이후에 아이를 봐줄 사람이 마땅히 없는 것이다.

 

회사에서 꾸준히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야근도 마땅히 감수해야 할 텐데 밤늦도록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 이렇게 되면 SBS 다큐에서 등장한 '엄마'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 전쟁을 치러야 한다. 

 

vis SBS 스페셜 '엄마의 전쟁'

 

또 다른 지인은 평생을 '여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눈치 보며 직장생활과 '엄마'를 병행하느니 그냥 다 포기하고 독신으로 살겠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현재 한국 사회는 '여자'로 태어나면 무언가 하나쯤은 포기해야만 한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세상은 자꾸 더 많은 것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만일 포기 않고 모든 걸 다 떠안고 가겠다고 한다면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 또한 이 처절한 전투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더 외롭다. 남녀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은 "아이에겐 엄마가 최고야"와 같은 말로 '여자'에게 '엄마'가 될 것을 강요한다.

 

이제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볼까 한다. 빨강머리 앤이 세상에 나온 1900년대 초기, '여자라면 모름지기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길러야지'라는 말이 과연 시대착오적이었을까?

 

via tvN '미생'

 

한국 사회는 앤이 살던 1900년대에서 여전히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자에게 '엄마'와 '여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우리 사회는 결과적으로 '저출산'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주변을 보면 갓난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워킹맘들을 위한 현실적인 정책들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은 마땅히 정치인과 정책 책임자들이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정책에 앞서 인식의 변화가 더 시급해 보인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워킹맘'이라는 말을 쓰지만 '워킹파파'라는 말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보다 강력하고 와 닿는 육아정책과 시민들의 인식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언제까지 책 속의 '빨강머리 앤'를 부러워하며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말이다.